육중한 짐을 매단 나비. 이 나비는 음악만 가지고는 충족시킬 수 없는 힘들이 자신의 내부에 잠재되어 있음을 느낀다.
국가와 가정에서 만장일치로 공인된 이 어머니라는 지위는 종교재판장의 심문권과 총살집행자의 명령권을 동시에 거머쥐고 있는 것이다. - p.8
결심하는 것을 도와주고 잘못된 결정을 예방해주는 것은 어머니의 의무가 아닌가. 그러면 나중에 애써서 상처를 아물게 할 필요가 없다. 상처를 미리 자초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차라리 자기 자신의 상처를 에리카에게 덧붙여 놓고 그 치유 과정을 감독하고 싶은 것이다. - pp.15-16
음악의 도시 빈! 여태껏 보존되어왔던 특성이 이 도시에서는 미래에도 여전히 유지될 것이다. 문화는 뽀얗게 살이 쪄 그 배 위에서 단춧구멍들이 터진다. 이 문화는 건져올리지 못해 해마다 점점 더 불어터져가는 익사체와도 같다. - p.19
에리카는 시간과 연령을 초월한 곤충이다. 그녀는 이야깃거리도 없고, 이야깃거리를 만들지도 않는다. 이 곤충은 움찔거리고 기어다니는 능력을 오래전에 상실했다. 에리카는 '무한'이라는 빵틀로 구워내졌다. 이 무한성을 에리카는 기꺼이 자기가 아끼는 작곡가들과 나누지만, 사랑을 받는 일에서만은 절대로 그들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중략) 결국 재창조자인 연주자도 어떤 창조자의 형식을 취하게 된다. 연주자는 연주라는 수프를 항상 자신에게서 나온 어떤 것으로 가미하는 법이다. 이를테면 자기 심장의 피를 연주에 떨어뜨려 넣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후략) - p.22
육중한 짐을 매단 나비. 이 나비는 음악만 가지고는 충족시킬 수 없는 힘들이 자신의 내부에 잠재되어 있음을 느낀다. - p.23
사람들은 이 여학생을 쳐다보고는 일찍이 음악이 그녀의 정서를 고양시켰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정서는 그녀로 하여금 주먹을 치켜들게 만들었을 뿐이다. - pp.24-25
(전략) 아니, 사실 그녀에게 가장 큰 충격은 한 사람이 남의 내부에 들어와 살며, 다른 사람을 수치심 없이 정복하는 일이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생각 속으로까지, 가장 깊은 내면의 관심 속으로까지 쑤시고 들어올 때가 있다.
이들은 그런 이유로 그녀에게 벌을 받는다. 그런데도 그녀는 이들을 결코 떨쳐낼 수가 없다. 그들에게 달려들어 개가 자기 먹이를 다루듯 그들을 털어내 보내지만 그들은 청하지도 않는데 그녀 속을 헤집어 그녀의 깊은 심층을 관찰하고는, 자신들은 전혀 이해할 수 없으며 자기들 마음에 안 든다고 감히 주장하는 것이다! 이들은 베버른이나 쇤베르크가 자기들 마음에 안 든다고 까지 떠들어대는 게 아닌가!
어머니는 언제나 사전 예고도 없이 그녀의 뚜껑 나사를 풀고 자심감 있게 손으로 파고들어와 휘젓고 쑤신다. 모든 것을 그렇게 뒤집어 놓고는 하나도 제자리에 놓는 법이 없다. 어머니는 짧은 시간에 무언가를 골라내서 끄집어내 돋보기로 들여다보고는 집어던진다. 그리고 나머지는 다시 정리해놓고 그것들을 솔, 스펀지와 걸레로 닦는다. 또 열심히 행주질을 해서 다시 나사를 맞추어 넣는다. 고기 가는 기계 속에 칼날을 끼우듯이 말이다. - p.32
예술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있고 특히 예술은 위로자라는 말이 있지만, 그 예술이 바로 고통을 몰고 오는 일도 가끔 있다. - p.34
자신은 사실 음악을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어머니는 자기 자식을 음악의 틀 속에 억지로 집어넣는다. 어머니와 자식 사이에는 공정한 보복 경쟁이 이루어진다. 딸은 자신이 어머니보다 음악적인 면에서는 훨씬 월등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자식은 어머니의 우상이고, 어머니는 자식에게서 그저 약소한 대가를 요구할 뿐인데, 그것은 다름 아닌 자식의 삶 전체인 것이다. 어머니는 자식의 삶을 자기가 평가하고 발전시켜 나가려 한다. - p.39
결국 운명은 공정할 생각이 없고 귀여운 애벌레 따위에는 속지 않는 것이다. - p.39
왼쪽 손가락들이 괴로워하고 있는 바이올린 현들을 내려 누른다. 고문당한 모차르트의 정신은 뒤틀리듯 한숨 쉬며 악기의 몸체에서 새어나온다. 모차르트의 정신이 지옥에서 비명을 지르며 튀어나오고 있다. 아무런 느낌도 없이, 그녀는 그저 끊임없이 소리만을 끄집어낼 뿐이다. 캑캑거리고 꾸루룩거림녀서 이 음들은 악기에서 도망쳐나간다. 그녀는 비판을 두려워할 필요도 없다. 그저 무언가가 울려나오면 되는 거고, 이건 바로 그녀가 음계를 넘어 더 높은 영역으로 승화한 다음 육체만 죽은 빈 껍데기처럼 여기 남겨놓았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녀의 몸에서 벗겨낸 껍데기를 혹시 남자들이 사용하지 않았을까 세심하게 살펴본 다음에 힘있게 먼지를 털어낸다. 연주가 끝나면, 잘 말라 서걱서걱 소리가 나는 뻣뻣하게 풀먹인 이 껍데기는 다시 뒤집어씌워진다. 스스로 아무 감각도 느끼지 않고 느껴보기 위해 자신을 누군가에게 내맡기지도 못하면서. - pp.50-51
그녀는 모든 것으로부터 차단되었기 때문에 정말 철저히 소외당했다고 느낀다. 사람들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지나쳐서 제 갈길을 간다. 그녀는 그저 작은 방해물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여행자는 떠나지만, 그녀는 남아 있다. 기름 먹은 버터종이처럼 길 위에 놓였다가 바람이 불면 겨우 조금 움직일 뿐인 것이다. 이 종이는 날아갈 수가 없어 , 그냥 그 자리에서 썩어간다. 이런 부패 과정은 여러 해가 필요하다. 아무 변화 없는 여러 해. - pp.54-55
아무것도 에리카 안에 들어맞을 만한 건 없다. 하지만 이 수도원 같은 곳은 그녀에게 제대로 들어맞는다. 그녀는 인간의 모습을 지닌 완전한 기구인 것이다. 자연은 에리카의 몸속에 어떤 구멍도 만들어놓지 않는 모양이다. 목수라면 누구나 여자에게 다 구멍을 만들어놓았을 바로 그 자리에 에리카는 커다란 나무토막이 들어 있는 듯한 기분을 느낀다. 이 나무토막은 고지대 삼림 속의 스펀지처럼 축축하게 빠른 속도로 썩어가고 있다. 그 덕에 에리카는 여장부로 군림하며 돌아다니는 것이다. - p.74
남자가 제일 먼저 시선을 주는 데가 그곳인데, 여기에는 하나의 법칙이 있다. 남자는 페니스가 있어야 할 자리에 아무것도 없는 일종의 결손 상태를 본다는 것이다. 우선은 아무것도 없는 무(無)가 눈에 들어오고, 그 다음으로 '어머니의 자궁'이라는 의미가 다가온다. - p.75
에리카는 아주 자세히 관찰하고 있지만 뭔가를 배우기 위해서는 아니다. 그녀의 마음속에는 더이상 아무 감정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자기 만족을 위해 지켜봐야만 한다. 그녀가 자리를 뜨려고 할 때마다 언제나 뭔가 알 수 없는 힘이 머리를 힘차게 유리창에 밀어붙여서 그녀는 계속 바라볼 수밖에 없다. 아름다운 여자가 앉아 있는 회전판은 원을 그리면서 돈다. 에리카도 어쩔 수 없이 보고 또 보아야만 한다. 그녀는 자기 자신에게는 터부이다. 스스로를 만지는 일은 있을 수 없다.
그녀의 좌우에서는 좋아서 신음하고 소리를 지르고 야단이다. '난 저걸 완벽하게 실감할 수가 없어. 사실 좀더 많은 걸 기대했는데'라고 에리카는 중얼거린다. pp.78-79
아무것도 찢기지 않았고, 아무것도 퇴색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빛바랜 것은 없다. 아무것도 그녀를 어쩌지 못했다. 이전에 없었던 것은 지금도 없고, 이전에 없다가 그동안 새로 생긴 것도 전혀 없다. - p.80
다른 사람이 전혀 눈치 못 채는 세계가 그녀 앞에 열린다. 그것은 레고의 나라, 축소된 세계다. 붉고 푸르고 하얀 조그만 플라스틱 조각들로 이 세계가 형성된다. 세계를 조립해 맞춰넣을 수 있는 플라스틱 조각들로부터 음악으로 가득한 세상이 여리게 울려퍼진다. 서툰 움직임을 교정할 길 없는 그녀의 뻣뻣한 왼손은, 건반 몇 개를 약하게 긁는다. 그 여자는 이국적이고 감각적인 것을 뇌쇄시키며 오성을 파열시키는 존재가 되어 날아올라가버리고 싶다. 그녀는 상세한 조립설명서와 모델이 있는 레고 주유소조차도 제대로 만들 수가 없다. 그녀는 보잘것없는 기기에 불과하며, 육중하고 느려터진 오성에 짓눌려 있다. 납같이 무거운 죽어버린 존재의 무게. 그리고 족쇄! 자기 자신을 향해서는 결코 쓸 수 없는 무기. 양철로 만든 죔쇠. - pp.84-85
그는 그녀에게 사랑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조심스럽게 가르쳐주고, 결국에 가서는 더욱 보람 있는 목표, 그러니까 좀더 나은 여자들을 찾아 더 난해한 과제로 옮겨갈 것이다. 여성이란 그에게 영원한 수수께끼니까. 이제 그는 한번 그녀의 선생이 되어 보는 것이다. - p.92
이 젊은 남자들은 에리카에게 욕망을 불러일으켰다가 다시 그것을 차단했다. 이들은 에리카에게서 가스 밸브를 잠가버렷다. 그녀는 그저 약간의 가스 냄새를 맡을 수 있을 뿐이었다. (중략) 그녀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지만 남자가 빨리 끝나게 하려고 자신이 엄청난 욕망에 휩싸여 있다는 암시를 주었다. 그러면 남자는 끝내기는 하지만 다음번에 또 다가온다. 에리카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한 번도 무엇인가를 느낀 적이 없었다. 그녀는 비에 젖은 마분지 조각처럼 무감각하다. - p.106
그녀의 순진했던 소원들은 세월이 지나면서 파괴적인 욕구로, 섬멸 의지로 변해갔다. 다른 사람들이 가진 것을 그녀는 자기도 억지로 소유하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이 가질 수 없는 것은 부숴버리려 든다. 그녀는 물건들을 훔치기 시작한다. (후략) - p.116
그녀는 결심한다. 아무에게도 자기 자아의 마지막 부분, 최후의 끝부분까지 털어놓지는 않으리라고. 모든 것을 혼자 간직하고, 가능하면 거기에 뭐든 더 덧붙이고 싶다. 무얼 가지고 있느냐가 한 인간을 결정한다. 그녀는 가파른 언덕을 쌓아 자신의 지식과 능력으로 높은 봉우리를 이루고 있는데, 그 정상 위에는 얼어붙어 미끄러워진 눈이 쌓여 있다. 그러니 아주 용감한 스키선수만이 이 정상을 정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스키선수도 언제든지 그녀의 언덕에서 미끄러져 얼음 사이의 나락으로 굴러떨어질 수도 있다. 그녀는 누군가에게 자신의 가슴으로 가는 열쇠, 즉 가파르게 깎인 그 정상으로 가는 열쇠를 맡겼다가 그것을 언제든지 다시 빼앗을 수 있다는 것이다. - pp.119-120
문 밖에서는 그녀가 잘나 보이려고 일부러 동참하지 않은 것들이 그녀에게 눈짓을 한다. 그녀는 남이 자신을 평가하거나 저울질하지 않게 하려고 불참해놓고도, 거기서 나오는 메달이나 기념 배지는 받고 싶어한다. 둔탁한 발톱 사이 피부에 구멍이 숭숭 나 있어 제대로 헤엄을 치지 못하는 동물처럼 겁을 먹고 머리를 위로 위로 뻗치며 어머니의 따뜻한 거름 속에서 퍼덕여대지만, 구원의 제방은 어디로 사라진 것인가? 안개에 휩싸인 육지 위로 한 걸음 올라가기가 너무 어렵다. 그녀는 미끄러운 언덕에서 수없이 굴러떨어진다. - p.120
그녀의 취미는 자신의 몸을 자르는 것이다. - p.122
혼자서는 전혀 걸어갈 수도 서 있을 수도 없다는 듯이, 그리고 혼자서도 이미 지구 표면에 너무도 강한 부담이 되고 있음을 모르는 듯이, 사람들은 늘 무리지어 몰려다닌다. 그게 외톨이인 에리카의 견해다. 받침도 척추도 없는 민달팽이들은 아무것도 모르면서, 어떤 매력에도 감동되거나 정복당하지도 않고, 음악이 가진 매력에도 꿈쩍 안 하며, 어떤 입김도 흔들 수 없는 가죽을 서로 맞대고 붙어 있다. - p.128
에리카의 손가락은 착실하게 훈련받은 사냥개의 발톱처럼 움찔거린다. 수업시간에 그녀는 학생들의 자유로운 의지를 하나씩 하나씩 차례로 꺾어버린다. 그러나 그녀는 마음속으로는 순종하고 싶은 강력한 소망을 가지고 있다. 그걸 위해서 집에 어머니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할머니는 점점 나이가 들어가고 있다 .(후략) - p.142
이곳 소프트 포르노에서는 모든 것이 단순한 외부세계에만 집중되어 있다. 이것은 미식가인 에리카에게는 성에 차지 않는다. 물어뜯으며 한데 뒤엉켜 있는 사람들 속에 도대체 무엇이 숨어 있기에 그렇게 사람의 감각을 뇌쇄시켜서 누구나 그것을 행하거나 직접 바라보고 싶어하는지 알아내보고 싶기 때문이다. 인간으로부터 마지막 은밀한 부분을 끌어내려고 그들을 해부할 수는 없지 않은가. 싸구려 영화에서는 여자들에 관해서 더 깊이 관찰할 수 있다. 남자들에 대해서 그렇게 제대로 꿰뚫어볼 수는 없다. 어차피 궁극적 근원은 아무도 볼 수 없으니까. 여자의 몸을 가른다 해도 볼 수 있는 건 오장육부뿐이다. 삶에 적극적으로 참가하고 있는 남자는 육체적으로도 외부를 향한다. 남자는 예정했던 결과를 끝내 이루어내기도 하고 해내지 못하기도 하지만, 해낼 때는 사람들이 사방에서 그것을 공공연하게 관찰할 수 있고 그 생산자는 자기 몸의 값진 생산품에 대해 즐거워하는 것이다.
남자들은 여자가 무질서한 신체기관 속에 결정적인 어떤 것을 숨기고 있다는 느낌을 가끔 받는 게 틀림없다고 에리카는 생각한다. 바로 이 마지막 부분에 숨겨진 것을 일깨워서 에리카는 더 새롭고, 좀더 깊고, 더욱더 금지된 것을 관찰하고 싶은 것이다. 그녀는 항상 새로운 미증유의 광경을 찾아가고 있다. 에리카의 육체는 여태껏 한 번도, 면도용 거울 앞에 펼처진 표준 자세에서조차도 그녀 육체의 침묵의 비밀을 폭로한 적이 없었다. 그 육체를 소유한 에리카 자신에게조차도! 그런데 스크린 위에 있는 육체들은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다. 매춘시장에 자신이 알지 못하는 어떤 여자들이 있는지 살펴보고 싶은 남자를 위해서도, 그리고 닫힌 관찰자인 에리카를 위해서도 역시 마찬가지로. - pp.150-151
두 사람이 서로에게 육체로 비춰지는 바로 그 순간 그들의 모든 인간관계가 끊어졌다. 메시지, 편지, 표시를 상대편에 보낼 수 있는 전령들도 없다. 더이상 한 육체가 다른 육체를 붙잡는 것이 아니라, 한 육체가 다른 육체에게 수단이 된다. 즉 육체는 그 안으로 고통스럽게 스며들기를 원하는 타자의 속성을 띠고, 깊숙이 들어가면 들어갈 수록 그 조직은 더욱 심하게 썩고 깃털처럼 가벼워져, 서로 낯설고 적대적인 두 개의 대륙은 멀리 날아가버린다. 이 두 대륙은 서로 충돌하여 함께 추락하고, 아주 작은 접촉에도 먼지가 되어버리는 아마도 걸레를 걸친 덜커덩거리는 골격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되는 것이다. - p.157
(전략) 에리카도 마찬가지로 단 한 번이라도 무엇을, 심지어 자신의 육체조차 따뜻하게 감싸본 적이 없다. 하지만 그녀는 누군가 자신을 감싸주기를 원한다. 그 사람은 그녀를 열망해야 하고, 그녀를 추적하고, 그녀를 우러러보아야 하며, 끊임없이 그녀를 생각해야 하며, 그녀에게서 빠져나가는 어떤 비상구도 가져서는 안 된다.(후략) - pp. 157-158
그녀는 길고 진한 포옹을 꿈구는데, 그것은 포옹이 이루어지는 즉시 왕비처럼 남자를 떨쳐버리기 위해서다. 이 얼마나 근사한 여자인가. - p.160
광대처럼 화장을 하고 플루트를 연주하는 여자는 허벅지를 다 드러내 보이며 발터 클레머를 유혹했다. 에리카는 그 처녀가 남들이 부러워하는 세련된 여학생임을 안다. 에리카 코후트는 그 처녀의 코트 주머니에 고의로 깬 물컵 조각들을 집어넣으면서, 그 어떤 대가를 준다해도 자신의 젊음을 다시 체험하고 싶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벌써 그렇게 나이 들었다는 사실이 다행스럽다. - p.222
발터 클레머는 그녀의 목에 키스를 하고 싶다. 해본 적은 없지만 말로 들은 적은 많다. 에리카는 클레머가 자기 목에 키스해주길 원한다. 하지만 그녀는 허락하지 않는다. 그녀는 헌신하고 복종하려는 마음이 솟아오르는 것을 느끼지만, 그런 마음은 자신보다 더 젊은 여자들에 대해 쌓여온 증오와 그에 더해지는 새로운 증오에 부딪힌다. 에리카의 헌신은 어떤 면에서도 어머니의 헌신과 비슷한 성격을 띠지 않는다. 그러나 증오는 모든 면에서 어머니가 평상시에 품는 증오와 유사하다. - pp.244-245
(전략) 그녀는 끊임없이 나이 계산을 하지만, 그런다고 에리카와 열여덟 살 처녀 사이의 거리가 조금이라도 줄어드는 건 아니고, 그 간격이 더 벌어지는 것도 아니다. 에리카가 그 나이의 여자들에 대해 느끼는 경멸감은 필요 이상으로 나이의 간격을 더 크게 만든다. 에리카는 밤마다 '어머니의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타오르는 불 위에 얹힌 분노의 꼬치에 끼워져 땀을 흘리며 돌아간다. 그리고 언제나 '음악'이라는 이름의 향기로운 구이 소스가 그녀에게 덧씌워진다. 그 아무것도 늙음과 젊음이라는 호가고부동한 차이를 변화시키지 못한다. 그리고 이미 죽은 대가들이 작곡한 악보에서도 더이상 뭔가를 변경할 수 없다. 모든 것은 존재하는 그대로다. 에리카는 이른 유년시절부터 그러한 악보체계에 묶여 있었다. 그 다섯 개의 선은 그녀가 생각이라는 걸 할 수 있을 때부터 그녀를 지배해왔다. 그 다섯 개의 선 이외에는 어떤 생각도 해서는 안 된다. 그 패턴은 어머니와 힘을 합하여 '규칙', '규정', '명령'이라는 찢어지지 않는 그물로 정육점에 걸린 분홍빛 햄처럼 에리카를 돌돌 말아놓았다. 이런 것들이 가져다주는 안정감은 불확실한 것 앞에서 두려움을 갖게 한다. 에리카는 모든 것이 언제까지나 지금 있는 그대로일까봐 두렵지만 또 뭔가가 갑자기 변할까봐 두려워한다. (후략) - pp.250-251
걸어가면서 에리카는 그녀의 아랫도리 끝에 있는 구멍을 증오한다. 예술만이 달콤함을 무한히 약속해준다. 조만간 아랫도리의 부패는 진전되어 더 많은 신체 부위를 차지할 것이다. 그러면 사람은 고통 속에서 죽고 마는 것이다. 섬뜩해하며 에리카는 자신이 백칠십오 센티미터 길이의 크고 무감각한 구멍이 되어 관 속에 누워 있고 흙이 되어버리는 것을 상상한다. 그녀가 경멸하고 소홀히 했던 구멍이 이제 와서 그녀를 완전히 지배하게 돼버린 것이다. 그녀는 이제 아무것도 아니다. 그리고 지금 그녀에게 이보다 더 간절한 것은 없다. - p.260
클레머는 자신이 이 여자를 탐내지 않는다고 느낀다. 그렇지만 그는 오래전부터 그녀 안으로 뚫고 들어가기를 원했다. 대가가 얼마이든 상관없다. 그러나 그 대가로 지불해야 하는 건 사랑의 속삭임 따위일 게 뻔하다. 에리카는 이 젊은 남자를 사랑하며 그를 통한 구원을 기다린다. 그녀는 종속당하지 않기 위해 사랑을 표현하지 않는다. 에리카는 자신이 약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지만 종속의 형태를 스스로 정하고 싶어한다. - p.270
그녀는 자신이 그의 악기에 불과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 악기를 연주하는 방법을 그에게 가르치는 건 바로 악기인 에리카 자신이다. 그는 자유로워야 하고, 그녀는 완전히 묶여 있어야 한다. 그렇지만 그녀를 결박하는 도구들은 에리카 자신이 결정한다. 그녀는 자신을 대상으로, 하나의 도구로 만들기로 결심한다. 클레머는 이 대상물을 이용하기로 결심해야 한다. 에리카는 클레머에게 편지를 읽도록 강요하면서도, 그가 편지의 내용을 알고 나서 그 내용을 무시해버리기를 마음속으로 바란다. 그리고 그가 느끼는 진정한 사랑이 편지 내용을 무시하는 비로 그 이유이기를, 또 그것이 그저 좋은 인상을 주는 사랑의 가벼운 허상에서 비롯된 게 아니기를 빈다. 그가 그녀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일을 거부할 경우, 에리카는 클레머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게 된다. 그래도 그녀는 자신이 선택한 존재에게 폭력을 행사하지 않으려는 그의 애정에 늘 행복해할 것이다. 그러나 오직 폭력이라는 조건하에서만 그는 에리카를 획득할 수 있다. 그는 개인으로서의 자신을 포기하면서까지 에리카를 사랑해야 하며 그녀 역시 자기를 부정하면서까지 그를 사랑해야 한다. 그들은 애정과 복종을 약속하는 공증된 증명서를 끊임없이 서로에게 건네준다. 에리카는 클레머가 사랑으로 폭력을 포기하겠다고 선언할 것을 기대한다. 에리카는 사랑하기 때문에 클레머를 거부할 것이며, 그녀가 편지에서 세부사항에 이르기까지 요구한 일이 실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내심, 자신이 요구한 일이 실제로 일어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 p.280
여자는 흔적이 남게 될 자신의 행위에 이성을 잃고 몰입한 채 목놓아 운다. 그녀는 완전히 혼자다. 다양한 빛깔의 플라스틱 꼭지를 가진 핀침으로 자신을 찌르는데, 침 하나하나는 각기 다른 자기 머리 색깔을 가지고 있다. 침의 대부분은 금방 다시 빠져 밑으로 떨어진다. 손톱 밑을 찌르는 일만큼은 아파서 감히 하지 못한다. 볼록하고 작은 핏방울들이 곧 그녀의 살갗을 뒤덮는다. 여자는 완전히 혼자인 채로 격렬하게 흐느껴 운다. - p.334
연장을 움켜잡듯이 남자는 이 어머니의 딸을 끌어당긴다. 에리카는 아직 비몽사몽간인 채로, 사랑이 어찌 이렇게 끔찍한 대가로 보상받을 수 있는가 하고 어안이 벙벙해 있다. 더군다나 그녀의 사랑이 말이다. 우리는 우리의 업적에 대해 항상 보상을 기대한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의 업적은 보상받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그 업적을 수월하게 이룩하기를 희망한다. (후략) - p.356
그는 마법에 걸려 있었지만, 잔뜩 구름 낀 늦은 여름날처럼 진실은 차츰 그에게 드러나고 있는 중이다. 오로지 자신을 속이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이 엄청난 증오에다 그토록 오랫동안 사랑이라는 옷을 입혀둘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사랑의 외투는 그에게서 사실 이미 오래전에 벗겨졌지만 그는 이제야 제대로 그걸 벗어던지고 있는 참이다. 바닥에 쓰러져 있는 여자는 그의 여러가지 행동을 열정적인 갈망으로 착각하고 있고, 실제로 오직 열정이라는 단어만이 그의 행동에 어느 정도 어울리기도 할 것이다. - p.358
그의 분노는 대상이 될 악이나 부정을 찾고 있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 반대다. 이 노여움은 천천히 그러나 철저하게, 사랑에 빠져 있는 동안에 형성된 것이다. - p.361
사랑과 이해를 구하면서 그는 단호하게 여자 안으로 밀고 들어간다. 그는 이제 모든 사람, 가장 악한 인간까지도 얻을 권리가 있는 애정을 힘있게 요구한다. 악당 클레머는 여자의 몸 속에서 마구 움직여댄다. 그는 여자에게서 달아오르는 신음 소리를 기대한다. 그러나 에리카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너무 늦었거나 너무 빠르거나 둘 중의 하나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기 때문에 그녀는 자신의 사기극의 희생제물인 것처럼 느껴진다고 털어놓는다. 이 사랑의 행위는 본질적으로 파괴일 뿐이라는 거다. 그녀는 진심으로, 그녀가 그를 사랑하기를 클레머가 원했으면 한다. 클레머는 신음 소리를 듣기 위해 에리카의 얼굴을 가볍게 때린다. 그녀가 신음하는 이유가 무엇이든 그에게는 상관없다. 에리카는 자기 안에서 욕구가 일어나기를 원하지만, 그녀는 아무것도 갈망하지 않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 pp.367-368
창문들이 햇빛에 반짝인다. 그 창문들은 에리카에겐 열리지 않는다. 누구에게나 열리는 문은 아니라는 거다. 누가 자신에게 도움을 청하는데도 돌아보지 않는 사람들. 많은 사람들이 기꺼이 돕겠다는 생각은 갖고 있지만, 실제로 행하진 않느다. 여자는 목을 옆으로 틀고 병든 말처럼 이를 드러낸다. 누구도 그녀 어개에 손을 얹어주지 않고, 누구도 그녀의 짐을 덜어주지 않는다. 그녀는 힘없이 자기 어깨를 내려다본다. 칼이 이제 그녀의 심장을 찌르고 후벼내야 한단 말인가! 그러나 그럴 힘이 남아 있질 않다. 아무것도 향하지 않은 채 시선을 떨구더니 에리카 코후트는 치솟는 분노도 울화도 열정도 없이 자기 어깨에 칼을 꽂는다. (중략) 세상은 그대로다. 상처도 입지 않았고 숙연해지지도 않는다. (중략) 시시각각 기다리는 끔찍한 통증은 찾아오지 않는다. 한 자동차 유리창에 반사된 햇빛이 눈을 찌른다. - p.379
그녀는 집으로 향한다. 그녀의 걸음은 차츰 빨라지고 있다. - p.379
엘프리데 옐리네크, 피아노 치는 여자
Elfriede Jelinek, Die Klavierspielerin
문학동네
역자 이병애
볼드체로 표기된 것은 원문에서 고딕체로 표기된 부분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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