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우리는 절대적 환대에 기초한 사회를 상상할 수 있다. 아니 사회란 본디 절대적 환대를 통해 성립한다고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절대적 환대가 불가능하다면, 사회 역시 불가능할 것이다.
이 책은 영혼과 육체의 대립 속에서 간과되어온 그림자의 문제, 다시 말해 '사람'의 문제를 다룬다. 우리는 어떻게 이 세상에 들어오고, 사람이 되는가? 우리가 사람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 받아들여진 것인가 아니면 이 세상에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사람이 된 것인가? 다시 말해서 '사람'이라는 것은 지위인가 아니면 조건인가? ('자격'이라는 단어는 지위를 가리키기도 하고 조건을 가리키기도 한다.) 조건부의 환대 역시 환대라고 할 수 있을까? 우리에게 주어진 환대가 언제라도 철회될 수 있다면, 우리는 진정한 의미에서 환대되지 않은 게 아닐까? 이것이 이 책이 제기하는 질문들이다. - pp,25-26
이 책은 또한 환대의 개념이 내포하는 어떤 역설을 해결하려고 노력한다. 칸트에게 있어서 환대의 권리는 우리가 (특정한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가 아니라) 사람으로서 갖는 권리이다. 하지만 우리가 환대를 통해 비로소 사람이 된다면, 우리를 사람으로 대우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환대를 요구하는 일이 어떻게 가능한가? (중략) 즉 절대적 환대 없이는 사회가 생겨날 수 없음을 보임으로써 - 절대적 환대의 필요성을 증명하려 하였다. - p.27
사람이라는 것은 어떤 보이지 않는 공동체 - 도덕적 공동체 - 안에서 성원권을 갖는다는 뜻이다. 즉 사람임은 일종의 자격이며, 타인의 인정을 필요로 한다. 이것이 사람과 인간의 다른 점이다. 이 두 단어는 종종 혼용되지만, 그 외연과 내포가 결코 같지 않다. 인간이라는 것은 자연적 사실의 문제이지, 사회적 인정의 문제가 아니다. 어떤 개체가 인간이라면, 그 개체는 우리와의 관계 바깥에서도 인간일 것이다. 즉 우리가 그것을 보기 전에도, 이름을 부르기 전에도 그 고유한 특성에 의해 이미 인간일 것이다. 반면에 어떤 개체가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사회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사회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어야 하며, 그에게 자리를 만들어주어야 한다. - p.31
노예에게 얼굴이 없다는 것은 그에게 지켜야 할 체면face 또는 명예honor가 없다는 것, 타인을 대함에 있어서 얼굴 유지face-work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또한 상대편에서 노예의 얼굴을 고려할 필요가 없음을 뜻한다. 노예는 고프먼이 분석한 '상호작용 의례' - 그 핵심은 상대방이 사람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 에서 제외된다. 다른 말로 하자면, 노예는 사회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는 타인 앞에 현상할 수 없고, 타인은 그의 앞에 현상하지 않는다. - p.36
패터슨은 "노예는 사람이 아니라 물건"이라는 로마법의 규정을 권력power의 관점에서 재해석한다. 로마법에서 사람, 물건, 지배dominium는 서로 연결된 개념으로, 노예제의 확대와 절대적 소유권의 확립이라는, 거의 동시적으로 나타난 두 역사적 현상 속에서 그 의미가 확정되었다. 로마인들에게 '물건'은 무엇보다 노예를 가리켰으며, '지배'는 일차적으로 주인과 노예의 관계를 지시하였다. 절대적 소유권, 즉 배타적인 지배란 주인이 노예에게 어떤 짓을 해도 제삼자의 간섭을 받지 않는다는 것, 혹은 사회적으로 그 행위가 승인된다는 것, 다시 말해 노예의 완전한 고립과 무력함powerlessness을 함축한다. 패터슨이 올바르게 지적했듯이, 소유권이란 사람과 물건의 관계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의 관계이다(사람과 물건이 '관계'를 맺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정확히 말해서 소유권은 일종의 권력관계이며, 노예가 물건이라는 법적 허구는 이 관계 안에서 노예가 처하는 절대적으로 무력한 위치를 표현한다. - pp.38-39
전쟁이라는 게임 속에서, 적대하는 두 국가는 각각 인구의 일정 부분을 차출하여 그들로부터 사람의 지위를 빼앗고, 총알이나 포탄과 같은 소모품으로 만들어버린다. 군인은 적에 의해서도 죽지만, 자기 편에 의해서도 죽는다(명령을 위반할 경우). 사실 군인이 적에 의해 죽는 것은 이미 자기 편에 의해서 언제든지 죽을 수 있는 존재로, 아니 어떤 의미에서 죽어 있는 존재로 강등되었기 때문이다.
고프먼은 『수용소』에서 재소자의 인격에 가해지는 체계적인 모독의 테크닉을 자세히 기술한 바 있다. (중략) 개인의 존엄을 침해하며 그의 자아 이미지를, 나아가 자아 자체를 왜곡시키는 이러한 테크닉들은 모든 종류의 '총체적 시설total institution'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데, 군대도 물론 그 가운데 하나이다. 군대에서 이런 과정은 훈련이라는 이름으로 합리성을 부여받고 있지만, 그 진정한 목적은 군인들의 인격을 부정하여 그들을 사물로, 사회적으로 죽은 사람으로 만드는 데 있다. 모독mortification의 어원에 죽음mort이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런데 군인들이 이렇게 인격을 박탈당하고 물건처럼 사용되는 동안에도 국가들 - '주권자들' 사이에서는 인격적 관계가 유지된다(만일 그렇지 않다면 강화가 불가능할 것이다). 국가들은 서로 전쟁을 벌이기도 하지만, 동맹을 맺고, 우의를 다짐하고, 돈을 꿔주거나 갚고, 축구 시합을 하기도 하는 인격체들이다. "전쟁은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라는 클라우제비츠의 명언은 이 사실을 가리킨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군인과 민간인을 구별하는 논리는 전쟁놀이를 할 때 각작 제일 아끼는 장난감은 건드리지 말기로 하자는 아이들의 약속과 비슷한 것이다. - pp.42-44
역설적이지만, 사형의 이 같은 비가시화와 '인간화'는 사형수가 벌거벗은 생명이 되었다는 징후로 해석할 수 있다. 『감시와 처벌』 첫머리에서 미셸 푸코는 국왕 시해 음모자 다미앵의 처형 장면을 상세하게 묘사하면서, 사형수의 고통받는 신체를 통해 스스로를 과시하는 권력에 대해 이야기한다. 하지만 범죄자의 신체를 극단적으로 사물화함으로써 그의 인격을 모독하려는 권력의 광기는 본의 아니게, 그 범죄자가 여전히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다미앵의 사지를 찢으면서 권력은 그의 인격이 뿜어내는 힘 - 베버가 카리스마라고 부른 것 - 에 대한 두려움을 표현한다. 범죄 행위가 대담할수록 범죄자의 카리스마도 커지며, 그의 인격을 박탈하는 의례 또한 그만큼 화려해져야 하는 것이다. 현대의 사형제도는 이와 대조적으로, 범죄자를 격리된 장소로 끌고 가서 소수의 입회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조용히 안락사시키는 방법을 택한다. 범죄가가 이미 사회 바깥에 있다는 생각은 그를 좀더 '인간적으로' 대우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그는 사람이 아니라 단순한 생명에 불과하기에, 그의 고통은 어떤 상징적인 가치도 갖지 않으며, 그에 대한 마지막 배려 역시 '동물 복지'를 논할 때와 유사하게, 불필요한 고통을 줄이는 문제에 집중된다. - pp.53-54
그러므로 사회를 유기체나 시계, 또는 벌떼가 와글거리는 벌집에 비유하는 것은 잘못이다. 사회는 그와 같이 물리적으로 분명한 윤곽을 갖는 객관적 실체가 아니라, 각자의 앞에 상호주관적으로 존재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면, 사회는 각자의 앞에 펼쳐져 있는 잠재적인 상호작용의 지평이다. 우리는 이 지평 안에서 타인들과 조우하며, 서로의 존재를 인정한다는 신호를 주고받는다. 타인이 내게 '현상한다'는 말은 그가 나의 '상호작용의 지평 안에 있다'는 말과 같다. 따라서 타인의 존재를 알아보고, 그가 나의 알아봄을 알아볼 수 있도록 내 쪽에서 존재의 신호를 보내는 것은 그의 사회적 성원권을 인정하는 의미를 띤다. 동시에 나는 이러한 행위를 통해 나 역시 그에게 현상하고 있다는 믿음 - 우리가 함께 사회 안에 있다는 믿음 - 을 표현하며, 상대방이 나의 믿음을 확인해주기를 기대한다. 물론 상대방은 나를 '무시'할 수 있다. 즉 나의 신호에 화답하지 않고, 마치 내가 '보이지 않는다'는 듯이 행동할 수 있다. 상호작용의 의례는 언제나 위반과 중단의 가능성을 내표하며, 그 때문에 문화적 코드의 단순한 실행 - '국지적 활성화' - 으로 간주될 수 없다. 의례의 사슬을 구성하는 행위들 하나하나는 질문이자 요구이며, 초대이자 도전이다. 말하자면 그것들은 '인정투쟁'의 계기들을 구성하는 것이다. 사회의 경계는 이 나날의 인정투쟁 속에서 끊임없이 다시 그어진다. - pp.58-59
세계화는 점점 더 선진국의 부유한 시민들과 그들을 위해 허드렛일을 하러 온 이주노동자들의 관계를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백인들과 원주민의 관계와 비슷하게 만들고 있다. 이주노동자들이 말썽을 부릴 때 언제든지 송환할 수 있다고 여겨지는 '본국'은 '다른 나라'가 아니다. 선진국에 수출할 커피나 설탕을 생산하느라 식량을 재배할 땅이 모자라고, 선진국의 손님들이 이용할 별장, 호텔, 스파, 골프장, 카지노를 짓느라 집과 학교를 지을 공간이 부족한 그 나라는, 반투스탄이 남아공의 일부인 것처럼, 사실상 선진국의 일부이다. 남아공의 백인들은 흑인들의 노동력을 이용하면서도 그들에게 성원권을 주지 않기 위해 반투스탄이라는 외국을 발명하였다. 경제적으로 이미 연결되어 있고 상호의존적인 세계에서, 외국이나 외국인이라는 범주가 사용되는 방식도 이와 비슷하다. 국제분업은 이 세계의 거주민들을 '유기적인 연대' 속으로 밀어넣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외국인이라는 범주에 집착하면서, 자기들이 하나의 사회 속에 있음을 부인한다. 그들은 외국인은 다른 나라에서 왔고 자기 나라가 있으므로, 내 나라 사람과 다르게 대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한다. 외국인으로서의 환대와 사회적 성원권의 부여는 구별되어야 한다고 말이다. 어쩌다가 잠깐 외국인이 된 사람이라면 이 말에 동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외국인으로 계속 살아가야 하는 사람, 외국인이라는 운명 속으로 추방된 사람에게 그 말은 다르게 들릴 것이다. 외국인으로서의 삶 외에 다른 삶을 택할 수 없는 사람에게 그것은 그가 결코 온전한 사람이 될 수 없다는 말과 같다. - pp. 71-72
여성이라는 범주에 언제나 붙어 다니는 더러움과 오염의 관념 - 그에 따라 여성은 더러운 여성과 깨끗한 여성으로 나누어진다 - 을 우리는 이런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 여성은 신발이나 밥그릇과 같은 방식으로 더러워지지 않는다. 즉 그 자체로는 더럽지 않지만 제자리에서 벗어나면 더럽다고 여겨지는 게 아니다. 가부장제도 하에서 여성은 사회 안에 어떤 적법한 자리도 가지고 있지 않다. 여성은 단지 스스로를 비가시화한다는 조건으로, 물리적인 의미에서 사회 안에 머무르는 것을 허락받고 있을 뿐이다. 여성이 자신의 존재를 주장하면서 동등한 사람으로서 사회 안에 현상하려는 순간, 이 허락은 철회된다. 여성이 보이기 시작하자마자 사회는 여성이 잘못된 장소에 있다는 것, 정확히 말하면 잘못 인쇄된 글자처럼, 여성의 존재 자체가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다시 말하면 여성은 장소를 더럽히는 존재로서만 사회 안에 현상할 수 있다. '깨끗한' 여성이란 보이지 않는 여성이다. - p.78 1
한편 다른 관점에서 본다면, 오염의 메타포는 그것이 겨냥하는 대상이 지배계급의 통제에서 벗어나 있음을 함의한다. '더럽다'는 말은 죽일 수도 길들일 수도 없는 타자에 대한 미움과 두려움을 담고 있다. 그 말은 상대방의 존재를 부정하는 동시에, 그러한 부정이 굳이 필요했음을 인정함으로써 그의 주체성을 역설적으로 인정한다. 그래서 어떤 페미니스트들은 '더러운 년'이라는 욕을 들어도 전혀 위축되지 않으며, 오히려 이런 말을 듣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는 것이다. - p.80
(전략) 사람이 수행적이라는 것은 사람다움personality이 우리 안에 있지 않다는 뜻이다. 사람다움은 우리가 원래 가지고 태어났거나(그래서 잃지 않으려고 애써야 하거나) 사회화를 통해 획득해야 하는 본질이 아니다. 그보다 사람다움은 우리에게 있다고 여겨지며, 우리 스스로 가지고 있는 체하는 어떤 것, 서로가 서로의 연극을 믿어줌으로써 비로소 존재하게 되는 어떤 것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본질을 갖지 않는 현상이다. - pp.83-84
(전략) 이를 통해 우리는 인격personality이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상호작용 속에서 끊임없이 현상하는 것임을 이해하게 된다. 고프먼의 표현을 빌리면, "얼굴은 그것을 갖고 있는 사람의 내부나 표면이 아니라, 만남을 구성하는 사건들의 흐름 속에 퍼져 있다." 우리는 얼굴face을 갖고 있다는 사실에 의해 사람이 된다. 하지만 이 얼굴은 우리 몸의 일부도 아니고, 영혼의 반영도 아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의 만남 속에서 얼굴이 있는 듯이 행동하고, 우리의 얼굴에 대해 존중을 요구함으로써 얼굴이 실제로 거기 있게 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상대방의 사람 연기에 호응하고, 그의 얼굴에 대해 경의를 표시하며, 그가 얼굴을 유지할 수 있게 도와야 한다. 2 말하자면 얼굴은 상호작용 속에서 가정되고 또 실현되는, 의례적 픽션이다. 우리는 서로의 얼굴에 대해 의례를 행함으로써 서로를 사람으로 임명한다. - p.87 3
여기서 얼굴과 가면이 다르다는 점을 지적해두기로 하자. 인격과 성격을 구별하듯이 우리는 이 둘을 구별해야 한다. 가면이 우리가 연기하고자 하는 성격과 관련된다면, 얼굴은 그 가면의 배후에 있다고 여겨지는, 연기자로서의 우리의 주체성과 관련된다. 나는 지금 가면의 뒤에 연기되지 않은 진짜 자기가 있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우리는 언제나 자기를 연기하며, 심지어 일기를 쓸 때도 그러기 때문에, 진정한 우리 자신이 어떠한지 결코 알 수 없다. 가면의 뒤에 - 즉 얼굴의 자리에 - 있는 것은 어떤 종류의 내면성이 아니라, 신성한 것the sacred 또는 명예이다. - pp.88-89
모욕은 존엄을 공격할 뿐 아니라, 실제로 그것을 무너뜨린다. 배타적 민족주의운동이나 파시즘은 먼저 배제하고자 하는 집단을 공공연히 모욕하는 데서 출발한다. 모욕당하는 집단이 여기에 효과적으로 저항하지 못하면, 그리하여 다른 사회 구성원들의 침묵과 방관 속에서 이런 모욕이 일상화되면, 그때부터는 법적으로 이 집단의 권리를 축소시키는 일이 가능해진다. - pp.103-104
현대 사회는 낙인의 존재를 부인하는 경향이 있다. 낙인은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믿음과 양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존엄의 관념은 낙인을 초래하는 불명예스러운 속성들을 포함하여, 사람들을 높이거나 낮추는 차이들이 모두 사소하고 우연적이며 비본질적인 것이라는 주장을 내포한다. 이에 따라 낙인자the stigmantized와 정상인the normal의 만남은 어떤 종류의 기만을 수반하곤 한다. 정상인은 낙인을 포용하는 듯한 몸짓을 한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마음속으로는 낙인자가 자신과 동등한 인간임을 믿지 않는다. (중략) '사회'를 대표하여 '소외된 이들'을 찾아가는 이 정상인들은 자기 앞에 있는 낙인자들을 아무나 덥석 껴안음으로써 자기가 그들에 대해 아무런 편견도 가지고 있지 않음을 과시하려 한다. 하지만 정상인들이 이렇게 낙인자들의 몸을 함부로 만질 수 있는 대상으로 취급한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관계의 불평등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 pp.122-123
우리는 순수한 폭력, 아무런 상징성도 띠지 않는 날것 그대로의 폭력과 의례로서의 폭력을 구별해야 한다. 체벌은 폭력인 동시에 일종의 의례이다. 체벌이 체벌당하는 사람의 협조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이 이 점을 잘 말해준다. 다른 모든 의례와 마찬가지로, 체벌은 맞는 사람과 구경하는 사람을 포함한 행위자 모두가 행위의 의미와 절차에 대한 지식을 공유하고, 그것이 이루어져야 하는 방식대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무언의 협력을 할 때만 성공적으로 수행될 수 있다. 종아리를 걷거나, 엉덩이를 내밀고 엎드리거나, 손바닥을 펴서 적당한 높이로 올리는 일, 매가 지나간 뒤에 다시 때릴 수 있도록 맞은 부위를 제자리에 갖다 대는 일, 복종의 표시로 눈을 내리까는 일 등이 그러한 협력의 예이다. (중략) 체벌이 하나의 의례로 구성되기 위해서는 체벌당하는 사람에게서 이러한 동의의 표현을 끌어내는 것이 필수적이다. 폭력의 의례를 순수한 폭력과 구별시켜주는 것은 바로 동의의 존재이기 때문이다(이 동의가 반드시 마음에서 우러나온 동의일 필요는 없다. ㄷ중요한 것은 겉으로 드러난 동의, 의례적인 수준에서 확인된 동의이다. - pp.129-130
우리는 이렇게 해서 모욕의 역설을 이해하게 된다. 모욕은 타인의 인격을 부정할 뿐 아니라, 그러한 부정에 대해서 부정당하는 사람의 동의를 강요한다. (중략) 하지만 모욕당하는 자가 모욕에 동의하는 순간, 모욕은 더 이상 모욕이 아니다. 그것은 의례의 일부이며, 질서의 일부이다. 결국 모욕은 자신의 본질을 부정하는 것을 최종적인 목표로 삼는 폭력이다. - p.131
(전략) 하지만 존비법을 이렇게 이해할 때 우리는 존비법의 목적이 존경의 표현을 의무화하는 데 있고, 존경이란 멸시와 마찬가지로 일종의 감정이라는 점을 잊기 쉽다. 존비법이 엄격한 사회는 일상적으로 엄청난 감정노동이 이루어지는 사회이고, 미처 처리하지 못한 감정의 찌꺼기들이 뒷골목에 흘러넘치는 사회이다(후략). - pp.135-136
한편, 사회를 상상적 공동체로 볼 때 사회이론의 핵심에 떠오르는 것은 성원권의 문제이다. 사회가 상상적 공도ㅇ체라면 그 경계는 불확정적일 수밖에 없다. 사회는 일차적으로 사람들의 머릿속에 들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그 사회에서의 성원권 역시 불확정적이다. 사회적 성원권은 이 점에서 시민권과 분명히 구별된다. 주어지거나 주어지지 않거나 둘 중 하나인 시민권과 달리, 사회적 성원권은 의례를 통하여 끊임없이 확인되어야 한다. 사람들은 상호작용 의례나 집단적 의례에 참여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의 성원권을 확인하고 자신의 성원권을 확인받는다. 사회란 결국 이러한 의례의 교환 또는 의례의 집단적 수행이 가능하다고 여겨지는 상상적 지평이다. - p.144
굴욕에 대한 고찰은 그러므로 구조와 상호작용 질서의 관계에 대한 질문을 제기한다. 현대 사회에서 이 둘은 분리되어 있는데, 우리의 논의 맥락에서 이것은 구조의 일부인 '경제'와 (순수한 의미에서의) '사회'의 분리로 나타난다. 이러한 분리에 의해, 우리는 (총체로서의) 사회 속에서 이중적 지위를 갖게 된다. 한편으로 우리는 노동자나 자본가로서 혹은 소비자나 생산자로서 시장에서 만난다. 우리의 관계는 계약적이다. 계약의 이름으로 우리의 불평등은 정당화된다. 다른 한편 우리는 사람으로서 연결되어 있다. 사람으로서 우리는 서로 평등하다. 계약관계의 기초에는 사람으로서의 평등이 있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은 형식적으로 평등하지만 실질적으로 불평등하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물어야 한다. 경제질서 속에서의 우리의 위치가 과연 사회관계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 p.162
(전략) 다른 말로 하면, 제도가 사람을 모욕할 때 그것은 모욕으로 인정되지 않는다. 하지만 신분주의든 아니든, 이런 관행이 노동자들에게 미치는 효과는 동일하다. 그들은 자기들이 사람대접을 받지 못한다고 느낀다. - p.165
현대 사회의 구성적 모순은 우정의 조건에 대해 생각해볼 때 가장 확연하게 드러난다. 우정은 선택을 전제하지만, 그 선택의 기준이 지위나 부 같은 물질적 조건이어서는 안 된다. 우정에 대한 많은 격언들은 벗을 선택할 때 오직 그의 영혼만을 고려하라고 조언한다. 하지만 우정이 주고받음을 통하여 만들어지는 이상, 물질적인 문제를 무시하는 것은 일종의 기만을 초래한다. 먼저 우정이 선택적인 관계임을 분명히 하기로 하자. 이 점에서 우정은 환대와 다르다. 환대는 시민적 의무이지만, 우정은 의무가 아니다. 환대를 거부하는 것(환대를 표현하지 않는 것 또는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모욕으로 해석되지만, 우정을 거절하는 것은 모욕이 아니다. 환대는 우정의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이다. 현대 사회는 보편적인 환대에 기초해 있다. 이 말은 모든 사람이 잠재적으로 친구임을 뜻한다. 하지만 환대가 우정으로 나아가는 데는 차별화의 원리가 작용한다. 우정은 차별성의 인정("너는 다른 사람들과 달라")이다. 우정이란 무수히 많은 사람 가운데 어느 한 명을 선택하는 것이고, 그를 특별하게 대우하는 것이다. 우정의 관점에서 보면, 누구에게나 줄 수 있는 것을 준다는 것은 아무것도 주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상대방에 대한 앎(또는 알아나감)에 기초한다는 점에서 우정은 기독교적 사랑과 구별된다. 기독교적 사랑은 무차별적이며, 개인들의 차이를 괄호 안에 넣는다. 그래서 아렌트는 기독교적 사랑의 진정성을 의심하였다. "기독교인은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각각의 사람이 오직 기회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적, 그리고 심지어 죄인조차도 사랑을 발휘할 수 잇는 기회에 불과하다. 이와 같은 이웃에 대한 사랑에서 실제로 사랑받는 사람은 이웃이 아니다 - 그것은 사랑 그 자체이다." 아렌트의 신랄한 지적에 따르면, 기독교적 사랑은 타자에게 모든 것을 내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타자에게 무관심하며 어떤 의미에서 타자를 이용한다. 타자에 대한 그 같은 헌신 밑에 있는 것은 증여를 통해 자아의 결핍을 메우려는 욕망이다. 4 - pp.174-175 5
하지만 순수한 관계를 지향할수록 우정은 쉽게 좌초한다. 우정은 연애처럼 안전한 정박지를 향해 나아가지 않는다. 우정은 맹세의 말이나 서약의 장표, 의례와 기념일, 증인과 보증인, 시작과 끝을 공식화하는 서류들을 알지 못하며, 처음부터 끝까지 두 사람만의 관계로 머문다(반면 결혼은 하나의 계약으로, 모든 계약이 그렇듯이 그 효력을 보증하는 제삼자를 포함한다). 우정을 지탱하는 것은 당사자들의 기억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우정을 순수한 시간으로 환원할 수 있다. 이는 우정이 그만큼 많은 결별의 계기들을 품고 있다는 말도 된다. - p.177
얼굴을 유지하는 데는 돈이 든다. 사회라는 연극 무대에서 성공적으로 배역을 수행하려면, 적절한 의상과 소품을 갖추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자아 이미지는 그리고 자기에 대한 감각은, 우리를 다른 사람들과 구별해주면서 동시에 동등하게 만들어주는 이런 소유물들에 크게 의지하고 있다. 그래서 수도원에서 군대에 이르기까지 모든 총체적 시설은 먼저 입소자들에게서 이런 물건들을 빼앗는 것이다. 얼굴을 유지하려면 또한 사교라고 불리는, 명예가 걸린 게임에 참여할 수 잇어야 한다. 선물은 이 게임에 사용되는 화살이자 방패이다. 경제력을 상실한 사람은 이런 무기들을 살 수 없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게임에서 탈락하게 된다. 경제적인 소외가 이리하여 사회적인 소외로 이어진다. - pp.180-181
한마디로 가부장제는 이념형으로서의 현대 사회와 원리적으로 대립한다. 현대 사회는 모든 구성원이 사람으로 나타나는 사회이며, 지위나 역할, 또는 이해관계를 떠나 사람으로서 서로를 대할 수 있는 사회이다. 다른 말로 하면, 현대 사회에서는 모두가 모두에 대해 우정의 가능성을 열어둔다. 가부장제는 이 이념형의 대립물을 구성하는데, 우선 집주인=남자만 온전한 사람의 지위를 누리고 나머지 구성원은 그의 소유물과 비슷한 처지라는 점에서, 그리고 사람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물건에 대한 관심이 가족 관계를 지배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가부장제에서 여자와 아이들에게 주어지는 성원권의 불완전함은 우정의 제약으로 이어진다. 우정은 남성적인 미덕이며, 주로 남성 주체의 인격적 성숙이라는 테마와 결부된다. - pp.185-186
하지만 한국 사회가 (뒤르켐이 가부장제의 종말과 연관시켰던) 고도의 산업화와 학력화, 그리고 신분 질서의 해체를 겪는 동안, 가족은 위의 그림과 사뭇 다른 모습으로 진화하였다. 뒤르켐의 예견과 달리, 능력주의 사회의 도래는 상속제도의 소멸을 가져오지 않았다. 상속의 방식 혹은 전략을 바꾸어놓았을 뿐이다. 부모들은 재산을 직접 물려주는 대신에, 자녀의 몸에 그것을 투자하고 그 몸을 물려주기로 마음먹는다. 그리하여 아이들은 상속자이면서 동시에 투자 대상, 즉 재산 자체가 된다. 외관상 많은 점에서 가부장제와 거리가 있어 보이는 이 새로운 가족 안에서, 재산의 관리 - 즉 아이들의 몸과 시간표의 관리 - 는 여전히 구성원들의 관심을 지배한다. 상속이 특정한 시점이 아니라 양육 기간 전체에 걸쳐 이루어지기 때문에, 가족은 만성적인 갈등상태에 놓인다. 부모의 상속 프로젝트에 동의하지만, 물건 취급당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 아이들, 재산관리인으로서 자신의 역할을 인정받고 싶어 하는 엄마, 가장이면서도 이 프로젝트에서 소외되어 있다고 느끼는 아빠가 갈등의 세 주역이다. 해마다 늘어만 가는, 학교와 집을 떠나는 청소년의 숫자는 가족의 위그를 알리는 다양한 징후들과 함께, 이 프로젝트가 얼마나 위험하고 성공하기 어려운 것인지 말해준다. - p.187
(전략) 하지만 자본주의의 발전이 가족의 경제적 기능을 완전히 박탈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자본주의 경제 안에서 가족은 노동력 재생산의 거점으로서, 그리고 실업의 충격을 흡수하고 경기 확장에 대비하여 예비 인력을 저장하는 장소로서 특별한 중요성을 갖게 된다. '가부장제를 보완하는 국가'가 시대착오적이라는 비난을 받으면서도 자본주의와 훌륭하게 조화를 이루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가부장적 가족에서 관계적 가족으로의 이행은 산업화가 수반하는 자동적인 변화가 아니다. 두 형태의 가족은 동시성 속에 있으며, 자본주의는 후자를 만들어내는 만큼이나 전자를 필요로 한다. - p.189
먼저 환대가 재분배를 포함한다는 점을 확인하기로 하자. 환대란 타자에게 자리를 주는 것 또는 그의 자리를 인정하는 것, 그가 편안하게 '사람'을 연기할 수 있도록 돕는 것, 그리하여 그를 다시 한 번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것이다. 사람이 된다는 것은 사회 안에 자리를 갖는다는 것 외에 다른 게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을 연기하려면 최소한의 무대장치와 소품이 필요하다. 이를테면 누군가를 초대할 수 있는 공간, 갈아 입을 옷, 찻주전자와 차를 살 돈 같은 것 말이다. 그러므로 환대는 자원의 재분배를 포함하기 마련이다. 이것은 아이들이 소꿉놀이를 시작할 때 먼저 장난감을 나누는 것과 비슷한 이치이다. 아무리 욕심 많은 아이라도 상대방이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으면 서로 초대할 수도, 선물을 주고받을 수도 없다는 걸 알기에, 기꺼이 살림을 나누어준다. - pp.193-194
증여는 인정을 추구할 뿐 아니라, 인정을 통해서 비로소 구성된다. (중략) 내가 어떤 물건을 소유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나를 그 물건의 소유자로 인정한다는 뜻이다. 증여도 마찬가지이다. 주는 행위 자체는 증여가 아니다. 주는 행위를 증여로 구성하는 것은 준 사람과 받은 사람의 관계에 대한 특정한 해석이다. (중략) 마찬가지로 우리는 식당 종업원이나 아파트 경비원이 우리의 한 끼 식사와 편안한 잠자리에 얼마나 큰 기여를 하든, 그들이 보수를 받고 일하는 한 개인적으로 감사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 보수가 아무리 형편없더라도 말이다. "가난한 노동자들은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익명의 기부자"라는 바바라 에런라이크의 말은 문제의 핵심을 정확히 찌르고 있다. 이는 증여의 논리가 환대의 논리와 전혀 다른 것임을 의미한다. 환대 역시 주는 행위이지만, 이 줌은 증여로 계산되지 않는다. 환대란 주는 힘을 주는 것이며, 받는 사람을 줄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것이다. - p..196-197 6
고래들의 공동체와 마찬가지로, 이 고대의 코즈모폴리스를 조긱하는 원리는 열린 커뮤니케이션 - 누구나 제약 없이 참여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 이다. 하지만 그것이 열려 있는 방식은 사뭇 다르다. 고래들은 아무 매개 없이 동시성 속에서, 모두가 모두에게 직접 연결되어 있다. 동일한 소리의 장場 안에 갇혀 있기에, 그들으 ㄴ교신 대상을 선택할 수 없으며 침묵 속으로 물러날 수도 없다. 다른 말로 하면 그들은 서로에게 청각적으로 완전히 노출되어 있는데, 이는 언제나 상대방을 침법할 수 있고, 또 상대방에 의해 침범될 수 있음을 뜻한다. 반면 도서관의 도시 알렉산드리아에서 영혼들은 책을 매개로 서로에게 접근한다. 그들을 연결하는 것은 소통이 아니라 소통 가능성이다. 커뮤니케이션의 지평 전체를 감싸는 소리의 궁륭이 아니라, 도처에서 조용히, 산발적으로 일어나는 교류들이다. 이 교류는 거리에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과 혼자 책 속으로 침잠하는 것을 모두 포괄한다. 독서와 대화 사이에는 아무런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 독서는 또 다른 대화 - 비동시적으로 이루어지는 대화 - 이기 때문이다. - p.200
절대 공동체에 대한 환상은 이러첨 '개인이냐 공동체냐'라는 잘못된 양자택일을 강요한다. 공동체에 속한다는 것이 나와 다른 사람 사이의 벽을 없애는 것 - 문자 그대로 '하나가 되는 것' - 을 의미한다면, 공동체에 대한 옹호는 사생활 침해를 정당화하는 구실로 쉽게 전락할 것이다. 하지만 개인과 공동체는 결코 대립적인 개념이 아니며, 공동체 정신을 추구하는 것과 사생활의 자유를 갖는 것 사이에는 본디 아무 모순도 없다. 개인에게 자리/장소를 마련해주고 그의 영토에 울타리를 둘러주는 것이 바로 공동체의 역할인 까닭이다. 뒤르켐이 지적했듯이, 공공성이 강화될수록 사생활의 자유는 오히려 커진다. 가부장제 하에서 기혼 여성과 미성년 자녀는 사생활의 자유를 갖지 못한다. 그들은 집안에서도 마음 편히 쉴 수 없고, 가부장의 눈치를 보면서 일종의 대기 상태에 있어야 한다. 물론 가부장의 성격이 어떠냐에 따라 그들이 느끼는 압박의 정도는 달라진다. 하지만 가부장이 언제든지 그들을 야단칠 수 있고 심지어 때릴 수 있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개인 공간에 대한 침범은 최종적으로 몸에 대한 침범으로 나타난다. 몸은 자아의 마지막 영토이자, 나머지 영토들 - "개개의 인간 존재를 둘러싼 가상의 구" - 에 대해 개인이 행사하는 주권의 원천이다). 그런데 가부장이 이런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은 국가가 가정을 가부장의 사적 영토로 간주하고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개입을 자제하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면, 가부장 사회의 약자들이 겪는 사생활 박탈은 그들이 공공의 힘이 미치지 않는 곳에 고립되어 있다는 사실과 관련된다. 좀더 일반적으로 말해서, 프라이버시의 결여 - '자기만의 방'이 없다는 것 - 와 공적 공간에서의 배제는 장소 상실placelessness의 두 형태로서, 동전의 양면처럼 맞붙어 있다. 사회 안에 자리/장소가 없는 사람, 사회의 바깥에 있는 사람은 자신을 위해 나서줄 제삼자를 갖지 못했기에, 사적 관계 안에서도 자신의 자리/장소를 지킬 수 없다. - pp.202-203
(전략) 하지만 절대적 환대가 타자의 영토에 유폐되어 자신의 존재를 부인당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뻗치는 일, 그들을 인지하고 인정하는 일, 그들에게 '절대적으로' 자리를 주는 일, 즉 무차별적이고 무조건적으로 사회 안에 빼앗길 수 없는 자리/장소를 마련해주는 일이라면, 우리는 그러한 환대가 필요하며 또 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한 환대는 실로 우정이나 사랑 같은 단어가 의미를 갖기 위한 조건이다. - p.204
환대에 대한 기존의 논의들은 환대를 사회의 외부에서 온 이방인들이 직면하는 문제로 여긴다. 하지만 이미 사회 안에 있는 사람들도 그들의 자리가 조건부로 주어지는 한, 환대의 문제를 겪는다. 절대적 환대라는 말로써 나는 데리다가 그랬던 것처럼 신원을 묻지 않고, 보답을 요구하지 않으며, 상대방의 적대에도 불구하고 지속되는 환대를 가리키려고 한다. 데리다는 이러한 환대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는 절대적 환대에 기초한 사회를 상상할 수 있다. 아니 사회란 본디 절대적 환대를 통해 성립한다고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절대적 환대가 불가능하다면, 사회 역시 불가능할 것이다. - pp.208-209
한편 현대 사회에서는 개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주어져 잇는 정체성의 규정 요소들, 예컨대 국적이나 출신 계급이나 인종이나 성별, 심지어 언어와 문화는 개인의 정체성 서사에 통합되는 한에서만 중요하고, 그렇지 않으면 우연하고 부수적인 요소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는 개인의 정체성의 핵이 더 이상 이런 요소들이 아니라, 그것들을 바탕으로 정체성 서사를 써나가는 주체의 저자성authorship 자체임을 뜻한다. 정체성에 대한 인정은 특정한 서사 내용("나는 레즈비언이다")에 대한 인정이 아니라, 서사의 편집권에 대한 인정이다. 우리는 정체성운동에 대해 많은 지식을 갖지 못했더라도(펨femme이나 부치butch 같은 단어를 모른다 해도) 그저 귀를 기울이고 고개를 끄덕이는 행위를 통해 그러한 인정을 표현할 수 있다("네가 레즈비언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네가 오늘은 레즈비언이라고 고백하고 내일은 그것을 부인해도 상관없다. 나는 너에 대해서 가장 잘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너 자신임을 인정한다"). - p.215
결국 신체공양 의례가 제가하는 문제는 중국인(혹은 한국인)의 야만적인 습속에 관한 것도 아니고, 유별나게 잔인한 심성에 대한 것도 아니다. 그보다는 한 사회가 성원권을 부여하는 방식에 대한 것이다. 유교 사회의 구성원들은 갚을 수 없는 빚을 지고 있다는 점에서 노예와 비슷하다. 물론 그들과 노예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들이 존재한다. 노예는 사람이 아니지만, 그들은 사람이다. 노예에게는 아무런 명예가 없지만, 그들은 명예를 지니며 명예를 추구한다. 노예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사람의 지위를 포기한다. 반면 효자와 충신은 사람다움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건다. 하지만 이 차이들은 어떤 역설에 의해서 희미해진다. 유교 사회의 구성원들은 사람다움을 증명하는 한에서, 조건부로만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들의 인격은 지속적인 시험 아래 놓이며, 언제나 잠재적인 비난에 노출되어 있다. 그들이 모든 비난의 가능성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은 죽음으로써 이 시험을 통과했을 때문이다. (후략) - p.226
그러므로 환대란 어떤 사람이 인류 공동체에 속해 있음을 인정하는 행위, 그가 사람으로서 사회 속에 현상하고 잇음을 몸짓과 말로써 확인해주는 행위라고 말하기로 하자. 그 경우 데리다가 제시하는 절대적 환대의 세번째 조건을 수용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어떤 사람을 절대적으로 환대한다는 것은 그가 어떤 행동을 하든 처벌하지 않는다는 게 아니라, 어떤 경우에도 그의 사람자격을 부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살인같이 반사회적 행동을 한 사람 역시 사회의 구성원으로 계속 환대된다. 다시 말해 그는 사회 안에서 자기 자리를 유지하며, 성원권을 박탈당하지 않는다. - pp.229-230 7
하지만 베카리아가 무제한의 처벌권을 인정하면서 단지 감성적인 호소에 의존하여 형벌의 경감을 시도한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베카리아는 오히려 범죄에 대한 처벌이 사회계약의 틀 내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역설한다. 범죄자는 사회의 바깥에서 사회와 적대하면서 무한한 복수의 가능성에 노출되는 게 아니라, 사회 안에 있으면서 그 자신도 동의하는 규칙에 따라 정해진 만큼만 처벌받는 것이다. 베카리아는 바로 이런 이유에서 사형에 반대한다. 사형은 범죄자를 사회 바깥으로 내몰고 사회의 적으로 취급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사회의 적이라면, 그는 더 이상 사회의 규칙을 따를 필요가 없어진다. 그의 행위를 범죄로 규정하는 법의 힘은 그에게 미치지 못하고 그의 앞에서 멈추어 선다. 그는 법의 바깥에 있으므로 범죄를 저지른 게 아니다. 따라서 사형은 더 이상 형벌이 아니다. 그것은 순수한 폭력일 뿐이다. 베카리아의 다음과 같은 말은 사형이 내포하는 역설을 정확히 지적한다. "사형은 어떤 의미에서도 권리가 아니다. 그것은 한 사람의 시민에 대한 국가의 전쟁이다." 그런데 이 말은 범죄자를 사회의 적으로 간주하는 한, 다른 모든 형벌에도 해당된다. 범죄자가 사회 바깥에 있다면, 우리는 그에게 어떤 처벌의 "권리"도 주장할 수 없다. 권리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는 주체들이 먼저 상호 인정 관계 속에 들어와야 하기 때문이다. - pp.234-235 8
(전략) 우선 사회는 주권자 - 국가나 총통 - 처럼 단일한 주체가 아니다. 사회를 이루는 것은 사람들이며, 그들 각자는 타자를 사회적 죽음으로부터 끌어내는 힘을 미약하게나마 가지고 있다. 그리고 자기를 위해 나서주는 제삼자가 한 사람이라도 있는 한, 벌거벗은 생명은 아직 완전히 벌거벗은 게 아니다(이는 발화의 장소성placedness이라는 주제로 우리를 이끄는데, 우리가 벌거벗은 생명들의 인권에 대해 아무리 열심히 이야기하더라도, 우리의 목소리가 그들에게 닿지 않느다면 그들은 사람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권 담론의 취약성은 그것이 신학적 관념 - '신은 자신의 모습을 본떠 인간을 창조하였다' 등등 - 에 기대고 있다는 사실보다는, 담론을 실천과 분리하여 비장소화한다는 사실에서 생겨난다). - pp.246-247
현대 사회의 도덕의 기초에 있는 것은 기독교가 아니라 절대적 환대의 권리이다. 즉 태어나는 모든 인간 생명에게 자리를 주어야 하고, 어떤 명목으로도 이 자리를 빼앗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다. 사람의 신성함이란 바로 이 원리를 말하는 것이다. 사람이라는 것은 사회 안에 자리가 있다는 것이며, 신성하다는 것은 이 자리에 손댈 수 없다는 뜻이다. 낙태의 합법화는 이 원리를 - 위반하기는커녕 - 다시 한 번 확인한다. 태아에게 장소를 줄 수 있는 사람이 엄마뿐이기 때문에, 태아를 환대할 권리 역시 엄마에게만 있다. 사회가 엄마의 의지와 무관하게 태아를 환대하기로 결정하고 엄마에게 임신을 유지하도록 강제한다면, 이는 한 사람의 몸을 다른 사람을 위한 도구로 사용하는 셈이 된다. 즉 엄마의 사람자격을 부정하는 결과를 갖온다. 따라서 절대적 환대의 원리를 일관성 있게 적용하기 위해서는, 태아가 아직 사회 바깥에 있으며, 태아를 사회 안으로 들여보내는 것은 엄마의 결정에 달려 있다고 말해야 한다. - p.259
공리주의자들은 '우리'가 언제나 이미 우리인 것처럼 이야기한다. 그들은 사회를 주어진 것으로 간주하며, 연대의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 그 결과 사회는 인구, 즉 숫자라는 관점에서 파악된 인간 개체들의 집합으로 환원된다. 사회에 대한 이러한 시각은 사람의 관념과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 공리주의자들은 사람자격이 하나의 성원권이라는 것, 우리가 사회에 의해 사람으로 임명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사람이라는 것이 생물학적인 사실에 속한다고 믿는다. 개인은 타인의 인정과 관계없이 자기 안에 내재된 특성에 의해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말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 때문에 어떤 사람이 실제로 사람인지 아닌지 판정하는 일, 다시 말해 그의 사람자격을 심사하는 일이 중요해진다. - pp.270-271
김현경, 사람, 장소, 환대
(모든 주석은 원주임)
문학과 지성사
- 이는 본질적으로 모든 여성이 더러움을 뜻한다. 성폭행이 함축하는 메시지가 바로 이것이다. 강간범들은 대개 '깨끗한 척하는' 여자들에게 자기들의 본질을 깨닫게 해주겠다는 거창한 목표를 갖고 있다. 이러한 가부장주의적 대의 없이 순전히 성충동만으로 일어나는 강간은 흔하지 않다. [본문으로]
- Erving Goffman, Interaction Ritual, London: Penguin Books, 1967, p.7; 어빙 고프먼, 『상호작용 의례』, 진수미 옮김, 2013, 아카넷, p.19 참조 [본문으로]
- 고프먼은 이것을 얼굴 유지라고 부른다. 얼굴 유지는 개인이 그 자신을 포함하여 누구도 낯이 깎이는 일이 없도록 자신의 말과 행동을 조절하는 것을 말한다. 얼굴 유지는 일종의 의례이다. "이것을 의례라고 할 수 있는 이유는 그 사람이 얼마나 존중받을 가치가 있느냐 혹은 그가 얼마나 다른 사람들을 존중하느냐를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여기서 문제이기 때문이다. (...) 얼굴은 그러므로 신성한 대상이다. 그리고 그것의 보존에 필요한 표현적 질서expressive order는 의례적 질서이다."(Erving Goffman, 같은 책, p.19) [본문으로]
- 한나 아렌트, 『사랑 개념과 성 아우구스티누스』. 서유경 옮김, 텍스트, 2013, p.171; 리처드 세넷, 『불평등 사회의 인간 존중』, 유강은 옮김, 문예출판사, 2004, p.181에서 재인용 [본문으로]
- 리처드 세넷, 같은 책, pp,180-183 [본문으로]
- 바바라 에런라이크, 『노동의 배신』, 최희봉 옮김, 부키, 2012, p.296 [본문으로]
- 교정 시설에 수감된 사람은 입소의 순간부터 인격을 부정당하는 경험을 하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범죄에 대해 책임을 묻는 것 그 자체가 범죄자에 대한 환대의 철회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법 앞에 선다는 것이야말로 사람이라는 증거라고 말할 수 있다. "범죄는 (무국적자가) 인간적 평등을 다시 얻을 수 있는 최고의 기회"라는 아렌트의 냉소적인 발언은 이 점을 가리키는 것이다(한나 아렌트, 『전체주의의 기원 1』, 이진우·박미애 옮김, 한길사, 2006, pp.517-518 [본문으로]
- 체사레 베카리아, 『범죄와 형벌』, 한인섭 옮김, 박영사, 2006, p.112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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