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으로, 종종 내가 느끼는 인상을 독자에게 전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가 수많은 문제와 위험을 내보인다 하더라도 최소한 권태롭지는 않다는 것을 말이다.
끝으로, 종종 내가 느끼는 인상을 독자에게 전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가 수많은 문제와 위험을 내보인다 하더라도 최소한 권태롭지는 않다는 것을 말이다. - p.7, 서문
필요할 것이다. (중략) 헛된 환상의 상징, 유토피아로서 이해되던 '달세계'라는 말을 이제는 포기하는 일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불과 20년 전만 해도 눈으로 볼 수 없다는 그 본질적 성격 때문에 가닿을 수 없는 현실의 전형적 예로 '달의 이면'이라는 말을 썼음을 생각해보면 참으로 재미있다. 이를 논한다는 것은 무용한 일이겠다. - p.39, '달과 우리'
안타깝지만 우리 시대는 시의 시대가 아니다. 우리는 이제 시를 창조하는 법을 모른다. 머리 위에서 펼쳐지는 경이로운 사건들로부터 시를 정제하는 법을 모른다.
어쩌면 너무 이른 것일까? 후에 우주의 시인이 와주기를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것일까? - p.41, '달과 우리'
책은 훌륭하고 진지하고 지속적이고 그것이 씌어진 목적과 전혀 다른 이유들로 즐거움을 줄 수 있다. 그리고 또한 흔한 일은 아니지만 비열한 목적으로 고귀한 책들이 씌어질 수 있다. 그러나 나는 개인적으로 세상을 더 좋게 발전시키는 방법을 '아는' 누구에게든 어떤 불신감을 갖고 있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런 사람은 자기 체계를 너무 선호하는 나머지 비판에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이 지나치게 강한 의지를 소유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러지 않으면 그는 단순히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세상을 바꾸려는 경향을 보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히틀러가 『나의 투쟁』을 쓴 뒤에 행한 일이다. 그리고 나는 많은 다른 이상주의자들이 충분한 에너지를 갖게 되면 전쟁과 학살을 촉발하리라고 종종 생각했다. - p.61, '왜 쓰는가?'
사실 이 범주는 철학자들의 범주와 일치한다. 그 사람은 천재거나 범인(凡人)이거나 오만한 자거나 인류를 사랑하는 자거나 애호가거나 광인이다. - p.61, '왜 쓰는가?'
분명히 이 피조물들은 '악'하지 않다. 하지만 그러한 도덕적 범주, 즉 선과 악이 인간 이하의 존재에게는 맞지 않다는 것을 인정할 필요는 있어 보인다. 최초의 세포와 함께 태어나 여전히 우리 주위에서 펼쳐지는 엄청나게 피비린내 나는 경쟁은 우리의 행동 기준 밖 또는 아래에 있는 것이다. - p.72, '고통에 반대하며'
어떻게 타자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과 비교해 판단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유아론은 유치한 판타지다. '타자'는 분명 존재하며, 그들 중에는 물론 우리의 길동무인 동물도 있다. 나는 까마귀나 메뚜기의 생명이 인간의 생명과 똑같은 가치를 갖는다고 믿지 않는다. 곤충이 인간처럼 고통을 감지하는지는 의심스럽다. 하지만 조류는 아마 감지할 것이며, 포유류는 확실히 감지한다. 모든 생명을 오염시키는 이 실체 - 모든 형태의 고통 - 의 엄청난 크기를 할 수 있는 한 줄이는 것은 모든 인간에게 주어진 어려운 과제다. 근본적으로 다른 가정에서 시작했을 때조차 결국 이 긴요한 의무에 이른다는 것은, 이상하지만 아름답다. - p.73, '고통에 반대하며'
책이나 이야기의 본질적인 나약함은 오늘날 모든 글이 불과 몇 달이면 그 뒤에서 더밀어대는 다른 글무더기에 의해 질식당한다는 사실로써 더욱 악화된다. 더구나 역사적으로 한정되는 규칙과 제한은 자주 변하는 경향이 있다. 모든 문학사는 풍요롭고 가치있는 작품들이 그 작품 자체보다 훨씬 덧없다고 판명된 원칙의 이름으로 논박당하는 일화들로 가득하다. 그로부터, 틀림없이 수많은 귀중한 책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것이라고 추론할 수 있다. 쓰는 사람과 어떻게 써야 한다고 규정하는 사람 사이에서 벌어지는 끝없는 싸움에서 패배한 것이다. - p.77, '불명료한 글쓰기에 대하여'
그리고 사실 그[각주:1]의 시는 죽어가는 인간의 가르랑거리는 소리 바로 그것이다. 그것은 깊은 균열이 그러하듯 우리를 매혹한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를 속여, 말해졌어야만 하는데 말해지지 않은 무언가를 빼앗는다. 그래서 우리를 좌절시키고 쫓아버린다. 나는 시인 첼란을 모방하기보다는 숙고하고 동정해야 한다고 믿는다. - p.83, '불명료한 글쓰기에 대하여'
하지만 우리들 산 자는 고독하지 않으므로 마치 우리가 고독한 것처럼 써서는 안 된다. 우리가 살아 있는 한 우리는 책임이 있다. 우리는 우리가 쓴 것에 대해 한 단어 한 단어 책임져야 하고, 모든 단어가 반드시 제 목표에 도달하도록 해야 한다. - p.84, '불명료한 글쓰기에 대하여'
그것들은 모두 우리가 사는 세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즉, 세상에 대한 구체적인 개념을 줄 것이다. 하지만 많은 경우 '이해하는 것'은 오히려 어떤 대상과 현상에 대해 우리가 이미지를 형성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을 의미한다(어떤 종교에 따르면 신에 대해서도 같은 일이 일어난다). 우리의 상상력에는 우리의 범위가 있으며, 우리는 상상력이 그 범위를 초월하기를 요구할 수 없다. (중략) 우리 같은 문외한에게 우리의 경계 너머를 슬쩍 볼 수 있게 하는 유일한 수단은 '이상한 데이터'다. 그것은 지식이 아니라 지식을 습득하기 위한 자극제다. - pp.158-159, '이상한 데이터의 책'
로스차일드 부인과 동료들은 벼룩의 도약을 감지해 작동하는 초고속 카메라 같은 기발한 기구들을 제작하여 포착하기 어려운 현상을 이해하고 재구성했다. 어떤 독자는 이 모든 연구의 유용성이 무엇이냐고 물을 것이다. 신앙이 있는 사람은 우주 만물의 조화가 벼룩에도 반영되어 있다고 답할지 모른다. 반면 일반인은 그러한 질문은 적절하지 않으며, 유용한 것만 연구하되는 세상은 운명이 우리에게 배정한 세상보다 더 슬프고, 더 빈곤하고, 어쩌면 더 폭력적이기까지 할 것이라는 주장을 선호한다. 사실상 두 번째 답은 첫번째와 그다지 다르지 않다. - pp.166-167, '벼룩의 도약'
나비는 왜 아름다울까? 물론 반(反)다윈주의자들이 주장하듯 인간의 기호 때문은 아니다. 나비는 최소한 최초의 인간이 나오기 1억 년 전부터 존재했다. 나는 필연적으로 상대적이고 문화적인 우리의 미(美) 개념이 몇 세기에 걸쳐 별, 산, 바다와 마찬가지로 나비 또한 본으로 삼아 형성되었다고 믿는다. - p.206, '나비'
그것은 두번재 탄생이지만, 동시에 죽음이기도 하다. 날아가버린 것은 정신이요, 영혼이고, 지상에 남아 찢겨 갈라진 고치는 유해다. 우리 의식 깊은 곳에서 쉼 없이 나풀거리는 나비는 작은 영혼이고, 요정이며, 때로는 마녀이기도 하다. - p.208, '나비'
거미가 잔인하기 때문에 싫어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거미는 잔인하다. 하지만 다른 동물보다 더하지는 않다. (중략) 고양이에 대해 말하자면, 그 잔인함이 (최소한 겉으로 보기에는) 거미보다 더 불필요하고 책임이 무거울지라도, 우리는 고양이를 이해하며, 어쩌면 사악한 포유동물로서 연대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동물은 도덕적 판단의 대상이 될 수 없다('너의 모든 미덕은/자연의 열매이기 때문에'[각주:2]). 하물며 우리 인간의 도덕 기준을 절지동물처럼 우리와 거리가 먼 동물에게 적용하려는 것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중략) 그보다는 거미의 희생자에 대한 우리의 연민이 무용하다는 것이 개연성이 있다. 그러므로 예컨대 양계장에서 사육되는 닭이나 인간에 의한 인간 희생자에게 연민을 보내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 pp.212-213 '거미에 대한 두려움'
우리들 각자에겐 늘 더 정교한 최신 능력이 필요하다. 세상에는 위험한 직업이 많이 있고, (명백한 것이든 숨겨진 것이든) 위험의 분석은 모든 직업훈련 과정의 기초가 되어야 한다. 모든 위험을 제거하거나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결코 불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모든 해결된 문제는 인간의 생명과 건강과 재산을 지켰다는 점에서 하나의 승리다.
능력의 대용물은 없다. (중략) 선의, 용기, 희생정신, 임시변통의 재간은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능력이 없으면 그것들은 해가 될 수 있다. 선의를 가진 사람들에게 지구의 평화는 약속되겠지만, 위급 상황에서 오직 선의만 있는 구조자를 신뢰하는 사람에게는 재난이 있으리라. - p.223, '호박의 힘'
경험 부족, 집중력 부족, 경솔함, 상대의 우월함의 결과로 당신의 왕이 그 어느 때보다도 치명적으로 위협당할 때(하지만 위협은 또렷한 목소리로 선언되어야 한다. 그것은 절대 은밀히 행해지지 않는다), 구석에 몰린, 결국 꼼짝 못하게 된 당신은 틀림없이 체스판 너머로 드리우는 상징적인 그늘을 감지할 것이다. 당신은 죽음을 경험한다. 그것은 당신의 죽음이고, 동시에 당신의 책임에 의한 죽음이다. 당신은 죽음을 살아내며, 그것을 몰아내고, 스스로를 강하게 한다. - p.225, '예민한 체스 선수들'
소설을 쓰는 것은 다르다. 그것을 초월적 쓰기다. 당신은 더 이상을 땅에 발붙이고 있지 않다. - p.247, '소설 쓰기'
지구의 모든 것, 아니, 우주의 모든 것이 당신 것이다. 그리고 우주가 당신에게 너무 좁다 싶으면, 당신은 당신에게 어울리는 또다른 우주를 창조할 수 있다. 그것이 물리학 법칙과 상식을 따른다면, 좋다. 아니라면, 그래도 좋다. 아니, 어쩌면 더 좋을 수도 있다. 어쨌든 당신은 재앙을 야기하지 않을 것이다. - p.248, '소설 쓰기'
이 환영들은 모두 당신에게서 태어난다. 좋건 나쁘건, 당신의 피가 흐르고 있다. 그들은 당신의 싹이다. 더 심각한 것은, 그들이 당신에게 배정된 스파이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당신의 일부를, 당신의 심리적 긴장을 드러낸다. 벽에 난 금이 더 벌어질지 어떨지 확인하기 위해 사용되는 유리 이음매처럼 말이다. - p.249, '소설 쓰기'
이유는 모르지만 현대 세계의 무대에는 희미하고 덧없으며 악마성도 카리스마도 - 외견상 유일하게 똑같이 끔찍한 상반된 재능들 - 결여된 회색 인간들이 나타나 행동하고 있다. - p.263, '운명의 주인들'
인간과 동물을 가르는 것은 말[言]이다. 말을 유용하게 사용하는 법을 배우자. 우리보다 조잡한 뇌를 가진 이들도 수천수만년 전에 또다른 식의 까다로운 문제들을 해결했다. 아래에서 올라오는 중얼거리는 소리를, 비록 그것이 금지된 국가일지라도, 높여야만 한다. 이는 공포뿐만 아니라 한 세대의 죄의식에서 비롯된 중얼거림이다. 우리는 그것을 증폭해야만 한다. - p.265, '운명의 주인들'
오늘날 우리는 훨씬 더 많은 것을 이해한다. 우주 창조자의 상상력은 우리가 가진 한계가 없으며 - 더 정확히 말해 아무런 한계가 없으며 - 우리의 놀라움 또한 한계 너머로 사라진다. 우리는 우주의 중심이 아닐 뿐 아니라, 우주와 이질적이기까지 하다. 우리는 특이한 존재다. 우주는 우리에게 이상하고, 우리는 우주 안에서 이상하다. - p.270, '하늘로부터의 소식'
이 이해하기 어려운 혼돈으로부터 조화를 찾아낼 수 있는, 그 조화가 우리의 전통문화와, 그리고 지구의 범위 내에서 우리를 인도하기 위해 만들어진 보잘것없는 우리 오감의 경험과 양립하도록, 어울리도록, 융합되도록 할 수 있는 과학자-시인은 아직 태어나지 않았고, 어쩌면 영원히 태어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늘러부터의 이러한 소식은 우리 이성에 대한 도전이다. - p.271, '하늘로부터의 소식'
인간의 미래는 불확실하다. 가장 번영한 나라에서조차 말이다. 게다가 삶의 질은 점점 더 나빠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엄청나게 큰 것과 엄청나게 작은 것에 관한 발견이 이번 세기와 이번 천 년의 이러한 결말에 무죄를 선고하기에 충분하다고 믿는다. 극소수의 사람들이 물질계에 대한 지식에서 얻어내고 있는 것은 아마도 이 시기가 야만으로 완전히 회기했다고 평가되지 않도록 할 것이다. - p.272, '하늘로부터의 소식'
벼룩을 손가락으로 집는 것이 사냥이라고, 또는 안식일에 책등에 무언가가 씌어 있는 책을 펴는 것은 '아마' 허용되지 않는다고(왜냐하면 그럼으로써 책등에 쓰인 메시지를 지우기 때문에) 쓴 사람은 누구나 틀림없이 우리가 읽으면서 웃은 것처럼 쓰면서 웃었을 것이다. 그는 허용되는 일과 허용되는 일을 구별하는 것에 관심이 있었고, 반면 우리는 재무제표, 혼합 콘크리트, 영숫자 부호에 관심이 있다 해도, 그는 우리와 다르지 않다. - p.288, '의식과 웃음'
앞에서 언급한 문제점들에도 불구하고, 나는 모든 화학자가 대학교 실험실에 대해 즐겁고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고 믿는다. 그곳에서 공동 작업과 관계된 강한 동료애를 키웠을 뿐만 아니라 매일 저녁마다, 그리고 과정의 마지막에는 더 강렬하게, '무언가를 하는 방법을 배웠다'는 느낌을 갖고 - 삶이 가르치기를, '무언가를 배웠다'와는 다른 - 그 곳을 떠났기 때문이다. - p.312, '화학자의 표지'
'당신은 때때로 당신의 문제가 자살로 해결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까?' 어쩌면 예고, 어쩌면 아니오다. 어쨌든 내가 당신에게 답을 말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 p.330, '두개골과 난초'
나는 이런 테스트를 불신한다. 내가 보기에 그것은 우리의 몇몇 기본적인 권리를 침해하고, 다른 무엇보다도, 그걸 처음 해보는 지원자가 더는 없기 때문에 쓸모가 없다. 그렇지만 그것이 게임으로서 다가올 때는 즐겁다. 그럴 때 그것은 허세를 떨쳐내고, 정말로 상상력을 자극하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이끌어내고, 우리와 관련된 무언가를 가르쳐줄 수 있다. - p.334, '두개골과 난초'
거의 40년 후 아우슈비츠를 다시 방문했을 때 내가 본 광경은 장중하지만 막연히 멀다는 느낌을 안겨주었다. 그와 반대로 난방용 석탄에서 풍겨 나오는 '폴란드 냄새'는 강하지 않은 냄새였지만 몽둥이로 후려친 것처럼 나를 각성시켰다. 그것은 급작스러운 각성이었다. 그때까지 잠들어 있던, 있는 그대로의 구체적인 기억의 완벽한 세계. 나는 호흡이 가빠졌다.
'그곳에서' 자유로운 세계의 우연한 냄새들이 우리를 그처럼 폭력적으로 상처 입혔다. 태양 아래 보트를 떠올리게 하는 뜨거운 타르, 베스키드 산맥에서 이끼와 버섯의 냄새를 실어온 숲의 미풍, 일터에서 마주친 '민간인'이 지나간 자리에서 풍기는 비누 냄새. - pp.356-357, '향기들의 언어'
'아래층에 사는 세입자'는 어쨌든 나타날 방법을 찾을 겁니다. 글쓰기란 스스로를 발가벗기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가장 명료한 작가 또한 스스로를 발가벗깁니다. 만일 스스로를 발가벗기고 싶지 않다면, 당신의 현재 일자리에 만족하십시오. 아, 깜빡하고 말을 안 했는데, 글을 쓰기 위해서는 쓸 무언가가 있어야만 합니다. - p.370, '젊은 독자에게'
어쩌면 우리는 현실과 연기와 게임의 중간즘에 있는 이런 잘못된 두려움, 예컨대 쥐, 미나리아재비, 거미에 대한 두려움의 필요성을 느끼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우리가 전통의 규칙을 따르는 방식이며, 그 안에서 성장해온 문화의 자식임을 입증하는 방식이다. 또는 어쩌면 그것은 더 가깝고 더 방대한 현실의 두려움을 환영으로 격하시키는 데 도움을 주는지도 모른다. - p.378, '두려움의 필요성'
우리는 고아이며, 고아의 불안 속에서 산다. 우리 중 상당수는, 아니 대부분은 기성의 진리를 믿는 것이 편리하고 경제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적이지만 잘못된 선택이었고, 지금 우리는 그 실패의 대가를 치르고 있다. 우리의 미래는 씌어지지 않았고 불확실하다. 우리는 긴 잠에서 깨어났고, 인간의 조건이 확실성과 양립할 수 없음을 보았다. 어떠한 예언자도 더이상 우리에게 감히 미래를 보여주지 못한다. 그리고 예언자의 몰락은 쓰지만 불가피한 약이다. 우리는 앞을 못 보는 채로 손으로 더듬어가며 우리 자신의 미래를 건설해야 한다. 산산조각난 우상의 파편들을 다시 짜맞추고 싶은 유혹에 굴복하지 말고, 새로운 우상을 세우지 말고, 자신의 미래를 밑바닥부터 건설해야 한다. - p.385, '예언자의 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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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심하은, 채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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