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나 홀로 외로운 날들이 나를 찾아온 거야.
"옛날과 별로 달라진 게 없지?" 방이 내게 묻는다. "그래? 안 그래?" - p.11
"물론 이해는 하지만, 그렇긴 해도... 때로는 저도 부인만큼 불행하답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사람들에게 제가 불행하다는 걸 보일 필요는 없지요." - p.12
아무도 내가 그런 험악한 상황에 놓여 있었던 것을 모른다. 물론, 무언가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찌꺼기처럼 남았다는 사실을 제외하고는. 그래, 언제나 찌꺼기가 남는 거야. - p.13
오늘 밤 파리의 밤 경치는 매우 아름답다. ...도시여, 오늘 밤 너는 너무 멋있구나. 나의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파리. 그러나 못된 여인처럼 네가 얼마나 사악할 수 있는지 나는 알지. 그렇지만 너는 나를 결국 죽이지 못했어, 그렇지? 그리고 그들도 나를 죽이지 못했고... - p.21
나는 거기서 오랫동안 눈물을 흘린다. 내가 불쌍해서. 그리고 그 정수리가 대머리가 되어버린 노부인이 가엾어서. 이 저주받을 세계에 내재하는 모든 슬픔을 생각하며 울고, 또 모든 바보들과 투쟁에서 진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서 운다. - p.36
나는 잘해 보려고 애를 쓰지만, 그들은 항상 내 능력을 속속들이 알게 되고, 내가 가는 길은 결코 다른 길로 연결되지 못한다. 항상 막다른 골목이다. 문들은 늘 닫혀 있다. 나는 안다... - p.41
(전략) "우린 당신이 죽은 줄 알았다고. 센 강 물살에다 구멍을 뚫지 그랬어? 왜 센 강에 빠져 죽지 그랬어?" 이런 문구들은 존경할 만한 사람들의 입에서도 춤추듯 흘러나왔다. 그들은 감상적인 노래의 가사처럼 모든 걸 가볍게 생각한다. 그게 바로 그런 사람들이 보여 주는 끔찍한 부분이다. 내가 그들을 생각할 때 끔찍해하는 부분은 그들의 잔인성도 그들의 교활함도 아니다. 특별히 힘든 걸 겪지 않은 때문인지 그들은 쉽게, 케케묵은 의식으로 생각하는 순진함을 지녔고 도대체 뭘 모른다는 점이다. 그들이 사는 이 망할 놈의 세상은 온통 진부하고 거짓투성이다. 그들의 모든 의식이 바로 이 깊이 없고 독창성이 결여된 진부함 속에서 태어나 자라고 그로 인해 살아남는다. 그들은 이 진부한 가증의 삶을 절대적으로 신뢰한다. 그러니 희망을 기대할 수 없다. - pp.53-54
나는 자존심이 없다. 자존심도 없고, 이름도 없고, 얼굴도 없고, 국적도 없다. 나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다. 너무도 슬프다, 너무도. 괜찮아. 나는 여기 그냥 사는 거야. 마치 지푸라기가 소용돌이의 가장자리에서 빙빙 돌며 떠다니다 점차 소용돌이의 한복판으로 빨려 들어가듯. 그 죽음의 중앙부, 그곳에서 모든 것은 정지 상태가 되지. 모든 것은 평온을 찾게 돼. 일주일에 2파운드 10실링, 그레이스 인 가의 옆 골목에 자리 잡은 방 하나... - pp.56-57
오늘 오후에는 모자 하나를, 내일은 옷을 한 벌 사야겠다고 생각한다. 나를 변화시키는 일을 행동에 옮겨야만 하겠어. 그러나 나는 거기 꼼짝 않고 앉아 있다. 유모차를 끌고 가는 남루한 옷차림의 늙은 여인들과, 단추를 꼭꼭 여민 까만색 외투를 입은 늙은 신사들이 오고가는 모습을 감상하며. - p.80
그가 입을 연다. "나는요, 인생을 이렇게 봐요. 누가 내게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났느냐?'고 물으면 내 대답은 '아니다'예요. 분명 나는 그렇게 대답했을 텐데, 단지 아무도 내게 그걸 묻지 않았지요. 내가 여기 있는 것은 나의 의지가 아니에요. 내 일생에서 발생한 대부분의 사건들은 내가 의도해서 발생한 것이 아니지요. 그래서 나는 내 자신에게 항상 이렇게 말한답니다. '너는 네가 부탁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다. 세상을 이렇게 만든 것은 네가 아니다. 네 지금의 모습도 네가 만들지 않았다. 그러니 네 자신을 괴롭히지 마라. 그저 인생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라. 너는 그럴 권리가 있잖느냐? 너는 세상을 이 꼴로 만든 죄 많은 자들 중 하나가 아니니까.' 우리가 부자도, 힘 있는 자도, 권력 있는 자도 아니라면 우리는 죄 지은 자도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인생이 돌아가는 대로 그냥 수용하고, 능력껏 행복하게 살면 되는 거지요.
그가 말하는 동안 내게도 이상한 생각이 슬슬 들기 시작한다. 그래, 어쩜 그가 맞아... 자, X 씨, 당신이 태어날 차례입니다. 저 아니에요, 전 태어나고 싶지 않다고요. 그럼 좋아요. 자, Y 씨, 가서 태어나도록 하세요. 누군가는 태어나야 하니까요. 빨리, 빨리, 서둘러주세요. 아니, Y 씨가 어디 갔나요, 숨었다고요? 그럼, Z 씨, 당신이 가서 출생하셔야겠군요. 매 분마다 하나씩, 그렇지 않으면 매 초마다 그렇게 인간은 태어나는 건가? - pp.82-83
"부인께서 저를 배반하지 않을 분이라고 생각돼서요." - p.93
기가 막혔냐고? 아니, 전혀. 내가 그런 정도에 기가 막힌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이런 삶을 살아본 경험이 없는 거지. 꿈속에 빠져 사는 삶, 그 꿈속에서 모든 얼굴들은 가면을 쓰고 있지. 살아 있는 건 단지 나무들뿐이야. 꼭두각시들을 조정하는 끄나풀이 눈에 보이기도 하는 세상. 인간의 본성을 아주 가까이서 관찰할 수 있는 세상이야. 이런 데서 사는 것도 영 가치없지는 않아. - p.110
사람들은 행복한 인생에 대해서 말하지. 그러나 우리가 죽느냐 사느냐에 더는 관심이 없을 때, 그게 바로 행복한 삶이야. 시간이 많이 지난 후에 그리고 많은 불행을 거치고 난 후에 우리가 그런 걱정 없는 경지에 도달하게 될 수도 있어. 그런데 그런 행복한 상태에서 오래 살 수 있게 누가 그냥 둘 것 같아? 결코 그런 일은 없어.
무관심의 천국에 도달하자마자 우린 또 거기서 끌려나오게 되는 거야. 천국에서 다시 지옥으로 떨어지는 거지. 우리가 세상에서 잊혀진 존재가 될 째, 즉 죽은 존재가 될 때, 세상이 그 때 우리를 구해 주지. 구해서 어떻게 하냐고? 아주 우쓰꽝스러운 존재로 만들어버리지. - pp.110-111
그가 무슨 관심이 있다고... 내가 그렇게까지 하지 않았어도 될 뻔했군. 그러나 이게 내가 인생을 사는 방법이다. 제발, 제발. 신사숙녀 여러분, 아저씨, 아줌마, 그리고 아가씨들. 나는 당신네들과 똑같아지려고 무척 애를 쓰고 있다고요. 성공하지 못한 걸 나도 알죠. 하지만 내가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 보세요. 모자 하난 고르는 데 세 시간을 허비했고, 매일 아침마다 내가 특출나지 않고 보통사람처럼 보이도록 한 시간 반 동안이나 노력을 해요. 내가 하는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발목을 잡는 족쇄가 되고, 내가 하는 생각 하나하나가 무거운 추가 되어 누르고 있어요. 내가 태어난 이래로, 나의 말 한 마디, 생각 한 가지, 그리고 행동 하나하나가 모두 조이고, 무게에 짓눌리고, 사슬에 묶였죠. 그러나 걱정하지 마요. 이런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나는 성공하지 못했다는 걸 아니까. 그렇지 않으면 단지 반짝 성공을 했거나... 하지만 내가 얼마나 열심히 노력했는지, 그렇지 않으면 감히 노력할 용기도 내어보지 못했는지 생각 좀 해줘요. 그리고 동정도 해주시고. 일테면, 당신네 인간들이 생각이란 걸 혹 한다면. 물론 그것도 의심스럽지만. - p.129
이 지랄 같은 방, 이곳은 과거의 추억으로 넘쳐난다... 이 방은 내가 그동안 자본 모든 방이 되며, 내가 걸었던 모든 길이다. 이제 모든 것이 질서정연하게, 파도치듯 내 눈앞에서 행진한다. 방들, 길들, 길들, 방들... - p.133
문제는 그게 다가 아니다. 그가 너무도 정확하게 언제 잔인해야 하고, 어떻게 친절하게 굴어야 하는지 안다는 건 큰 문제가 아니다. 내가 분명 그를 사랑한다고 생각하던 그날 나는 다른 문제가 있다는 걸 알았다. - p.153
그러니 자, 생각해 봐요. 인생을 야릇하게 만드는 건 이런 이상한 사건이 발생하기 때문도, 사람들이 그 사건들을 겪어냈기 때문도 아니라니까요. 이런 괴상한 사건이 결국 잊혀진다는 사실이 인생을 요지경으로 만들지요. 우리가 생각하기에 천추와 같았던 어떤 시간이 결국 퇴색되고, 잊혀지며, 뇌리에서 사라진다는 것, 이것이 인생을 우스꽝스럽게 만드는 거라니까요. 우리가 결국 잊게 되고 그러니까 매일이 새로운 날이 되겠죠. 그래서 누구에게나 희망이 있는 거예요.
이제 우리의 운은 바뀌었고 인생 신호들은 온통 빨간불이다. - p.167
방? 좋은 방? 아름다운 방? 욕실이 달린 아름다운 방? 높게 낮게, 앞으로 뒤로 그네를 타네... 이런 일이 발생했고, 저런 일도 발생했지.
그리고 나 홀로 외로운 날들이 나를 찾아온 거야. - p.168
내가 결국 에노를 사랑했었나? 에노는 나를 사랑했나? 모르겠다. 단지 그와 헤어진 이후 내가 완전히 부서졌다는 건 안다. 한꺼번에 와르르 무너진 건 물론 아니다. 처음엔 이런 일이 일어났고, 다음엔 저런 일이 일어났지... - p.168
그러나 그런 황금빛 날들은 계속되지 않는 법. 오후의 태양도 슬프게 보일 수 있다. 그렇지? 모든 것은 슬프게 보일 수 있어. 오후의 태양도. 모든 것이 슬프고 두렵다. - p.170
(전략) 그리고 술이나 한두 잔 마시면, 난 오늘이 오늘인지 어제인지 내일인지도 모르게 되겠지. - p.171
르네를 만나는 것 때문에 내가 했던 모든 불안과 흥분의 움직임들은 결국은 피상적인 것일 뿐이다. 나의 마음 저 밑에서 나는 무감각하다. 마음 저 깊은 곳에 있는 물은 고여서 정체되어 있고, 조용하며, 무관심하다. 다시 말하면 죽음에 근접한, 그리고 증오와 매우 흡사한 씁쓸한 평화가 있을 뿐이다. - p.177
(전략) 그러나 '내일'이라는 단어를 생각하자 내 머릿속에는 어떤 틈이 생기는 것 같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공간. 마치 내가 텅 빈 공간 속으로 떨어져 내리는 것 같은 느낌이다. 내일은 결코 오지 않는다. - pp.184-185
"나는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인간인가 봐요. 내가 감성이 결여된 사람이란 걸 느끼지 못했어요?" 내가 말한다.
어떤 책의 제목이 '단지 이성만 발달한 사람'이라든지 '내가 꿈꾸는 걸 방해할 수 없다'라면 얼마나 우스울까? 이 책이 독보적이라고 인정받고 어떤 확신을 줄 수 있는 책이 되기 위해서는 그 작가가 남자여야 하지 않을까? 참으로 유감이다. 유감이야. - p.187
"지난번 나를 들여다볼 때 넌 지금과 달랐었지, 안 그래? 나를 들여다보는 얼굴을 내가 모두 기억하고 있다면 넌 믿겠니? 그러고는 나를 또 보려고 올 때 내가 간직하고 있던 그들의 과거 유령을 가볍게 마치 메아리치듯 그들에게 던져주지. 화장실의 거울들은 모두 그래." - p.197
"내가 뭘 두려워하는지 알고 싶어요? 그래요. 그럼 말해 주지요... 난 남자가 정말 무서워요. 남자보다 더욱 무서워하는 건 여자지요. 내가 너무나 두려워하는 건 망할 놈의 인간들이지요. 인간들이 다 무서워요. 물론이지요. 누가 이 더럽고 탐욕스러운 인간들을 두려워하지 않겠어요." - p.200
"내가 두렵다고 말할 때 나는 '두렵다'는 단어를 썼지만, 사실 내가 의미하는 건 내가 인간을 증오한다는 거예요. 그들의 목소리도, 그들의 눈도, 그들이 웃는 모습도 나는 모두 증오해요. 나는 인간이 하는 모든 짓거리들을 모두 모두 증오해요. 이건 잔인하고, 바보 같은 짓이며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한 일이지만, 자살할 배짱도 없었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벌써 인간 세상을 떠났을 텐데. 증오는 점점 심해졌지요. 이쯤 해둡시다." - pp.200-201
...나는 내 자신에 대해 잘 알고 있다. 넌 내게 자주 말했지. 넌 나 자신을 감쌀 환상이라는 넝마조각 하나도 남겨 주지 않았어. 그리고 나는 너도 어떤 인간인지 알아. 너 같은 인간이 되고 싶지도 않아. - p.201
그는 슬퍼 보인다. 그가 말한다. 아주 낮은 목소리로, 그리고 나를 만난 이후 처음으로 매우 강한 악센트를 섞어서. "저는 상처들이 있어요." 그가 상처라는 단어를 말할 때 어찌나 이상하게 발음을 했는지 나는 알아듣지 못했다. - p.201
나는 죽은 사람처럼 강하단다. 죽은 사람. 그게 내가 얼마나 강한가를 설명하는 단서지. - p.212
듣지 말아요. 그건 내가 말하는 게 아니니까. 귀 기울이지 말아요. 그 목소리는 나와 아무 관계가 없는 거예요. 맹세해요. - p.213
당신과 당신의 상처들, 얼마나 재미있는지 알기나 해요? 당신은 나를 정말 웃게 만들었어요. 다른 사람들의 상처들. 그것들은 얼마나 우스운 것인가! 난 당신을 생각할 때마다 웃을 거예요... - p.214
그렇지만 내 모습이 어떤지는 이제 아무 상관없어. 나는 이제 단순한 여인이고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아. 이제 나는 내 자신을 찾은 거야. 모고 싶으면 보라지. 난 이렇게 말할 거야. "당신이 가버렸기 때문에 난 이 꼴이 되도록 울었어요." - p.220
그는 입을 열지 않는다. 그것만도 다행이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나는 그의 눈을 빤히 응시한다. 그리고 내 인생에서 마지막으로 혐오스러운 인간의 모습을 증오하며 바라본다. 마지막으로... - p.221
진 리스, 한밤이여, 안녕
Jean Rhys, Good Morning, Midnight
펭귄클래식 코리아
역자 윤정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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