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The Talos Principle이 출시 10주년을 맞아 Reawakened 버전으로 리마스터 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정식 한국어 번역도 BADA Games에서 새로 맡아 크게 개선되었으므로 이 블로그에서 개인적으로 번역한 기존의 The Talos Principle과 Road to Gehenna 포스트들은 비공개로 전환합니다.

취미로 했던 미숙한 번역이었지만 게임 플레이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었다면 기쁘겠습니다.

새로 번역된 탈로스 법칙과 게헤나로 가는 길의 이야기를 즐겨주세요.

감사합니다.

 

수위는 계속 올라갔고, 우리는 계속해서 일했다.

 

매일 더 많은 사람들이 도착했다. 대부분은 우리와 같은 일꾼들이었다. 일부는 존의 친구들이었다. 우리는 방주가 드리운 그림자 밑에 세워진 광대한 텐트촌에 살았다. 존의 친구들은 소음을 피해 편안한 방갈로에서 살았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계속해서 일했다.

일은 고되었지만, 적어도 우리가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었다. 우리는 미래를 짓고 있다고. 나는 존이 선지자일 거라고는 믿지 않았지만, 이것이 신의 행함일지도 몰랐다.

그래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계속해서 일했다.

때로는 내가 지옥에 있다고 생각했다. 드릴과 톱, 연기와 불똥으로 이루어진 만마전. 마치 윌리엄 블레이크의 사탄 같은 풍차를 천 배는 더 확대해 놓은 것 같은 곳. 추울 때조차 우리는 온통 땀을 흘렸다. 뼈가 아파왔고 밤에는 죽은 사람처럼 잠을 잤다.

하지만 어떤 날에는, 난 우리가 하는 일의 아름다움을 봤고, 우리의 장인 정신과 노력에 자부심을 갖고는 했다. 방주가 형상을 갖추어감에 따라 나는 사람의 손으로 이뤄낼 수 있는 일에 점점 더 큰 경이를 느꼈다. 우리가 짓고 있는 것은 단지 그 속된 일부를 합친 것보다 더 대단한 것이었다. 어째선지 우리는 평범한 금속을 성스러운 그릇으로 바꾸도록 축복 받은 것 같았다. 때로 나는 우리가 속세를 뒤에 남겨두고 떠나, 신화나 전설의 시작점에 서 있는 것 같다고 느꼈다.

그래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계속해서 일했다.

존은 주기적으로 작업을 확인하러 왔다. 대부분은 그를 존중했다. 죄수들도 그랬다. 결국 그가 죄수들에게 목적과 희망을 주었으니까. 누가 또 그와 같은 말을 할 수 있을까? 치러야 할 대가가 있다면, 분명 그럴 만한 가치는 있었다.

하지만 모두가 존을 선지자로 대한 것은 아니었다. 몇몇 사람들은 무례하게 더 나은 음식과 더 따뜻한 담요를 요구했고, 그들 중 목소리가 가장 큰 사람들은 사라져서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렇다고들 했다. 난 너무 바쁘고 지쳐서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계속해서 일했다.

삶은 내 육신이 주인공이고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 백일몽이 되었다. 손과 무릎, 근육과 뼈, 굳은살이 박인 피부와 비에 젖은 머리카락이 내게 남은 전부였고, 잠을 잘 때조차 나는 꿈 속에서 자르고 구멍을 뚫고 용접했다. 이에는 모종의 평화가 있었지만, 이는 망각에 가까운, 만족감이 없는 평화였다.

내게 남은 아주 작은 일부분은 우리가 짓고 있는 방주가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닫기 시작했다. 우리 중 시종으로 선택된 사람들을 제외하면. 나는 호화로운 객실과 바와 심지어는 작은 카지노를 만드는 걸 도왔고, 그게 불합리한 일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만일 그들에겐 이런 걸 누릴 자격이 있다면? 존이 작업 현황을 확인하러 올 때면 그들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은 우리 중 누구보다 훨씬 더 깔끔했고, 훨씬 더 현명했다. 어쩌면 그들은 자신이 하는 일을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 어쩌면 충분히 열심히 일하면 나도 선택 받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래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계속해서 일했으며, 대륙은 계속해서 가라앉았고 수위는 계속해서 올라왔다.

어느 날 매튜가 방주의 뱃머리에서 일하는 바솔로뮤를 봤다고 내게 말했다. 내 안의 무언가가 잠깐 깨어났고, 나는 바솔로뮤를 찾으러 갔다. 바솔로뮤는 텐트에서 반쯤 물에 젖은 마분지에 그림을 그리려고 애쓰고 있었다. 난 그의 교회에서 본 것에 대해 말했고, 바솔로뮤는 수치심에 나를 외면했다. 그가 그림에서 주장한 것처럼 우리를 구할 방법에 대해 정말로 알고 있냐고 묻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더 말해주기에는 그는 그 스스로를 너무나 증오하고 있었다.

나는 다시 멍한 상태로 돌아왔다. 방주의 꼭대기에선 이제 바다가 보였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고, 경비원들은 점점 더 인내심을 잃어갔다. 우리는 더 오래 일하기 시작했다. 사고가 일어났고 매일 누군가 다치거나 죽었다. 다리가 으깨진 사람을 봤고, 그의 비명소리가 떠올라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하지만 우리가 제 때 방주를 완성하지 못한다면 모든 것이 사라질 것이었다. 이제 방주는 그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그래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계속해서 일했다.

소란을 일으키고 다니는 사람에 대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고, 나는 단번에 그게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믿음을 잃고 신을 위해 일하는 성직자. 제이콥의 모래 주머니들은 쓸려 나갔고, 이제 그는 또 다른 무의미한 싸움을 시작하러 왔다

하지만 사람들은 귀를 기울였고 제이콥의 목소리는 점점 더 커졌다. 방주는 여러분의 것입니다, 그가 말했다. 이를 이룬 것은 여러분의 땀과 피이며, 이는 여러분의 구원을 위한 수단이 되어야만 합니다.

소란을 일으키는 사람이 몇 명 뿐이었을 때는 그들을 진압하기 쉬웠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수 십 명이었고, 곧 수 백 명이 되었고, 이내 수 천 명이 되었다. 존의 친구들은 신경이 곤두섰고, 존은 예언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며 사람들에게 설교했다. 하지만 파도 소리가 그를 삼켜 버렸다.

그리고 여전히, 여전히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믿음을 잃어버렸고, 내가 보고 겪은 그 모든 것들에도 불구하고 나는 겨우 몇 조각만을 되찾았을 뿐이었다. 그리고 내가 아무리 조각들을 다시 짜맞춰보려 해도, 그 그림은 여전히 망가져 있었고 내 손은 여전히 피에 젖어 있었다.

어쩌면 의미를 만들기란 아예 불가능한 일일지도 몰랐다. 어쩌면 우주가 망가졌기에 그림 또한 망가졌는지도 몰랐다. 어쩌면 신이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는 떠나버렸는지도 몰랐다. 어쩌면 이게 신의 첫 시도라서, 신은 어린아이의 그림을 그릴 뿐이고 우리는 걸작 속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은 막대 인간들인지도 몰랐다.

지쳤다. 세상은 이치에 맞지 않았고, 내가 보일 수 있는 유일한 반응은 이를 외면하고 잠을 청하는 것 뿐이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숨을 헐떡이며 깨어났다. 지진이 점점 더 심해졌다. 바다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건 종말이었고, 그렇지 않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나는 무엇을 배웠던가? 아무것도 배우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그걸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여전히 나는 두려웠다. 여전히 나는 혼자였다.

그래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계속해서 일했다.

파도가 우리 바로 앞에 닥쳐왔다. 방주는 완성되었고 아름다웠다. 가이사의 영광을 위해 노예들이 지은 기념물. 하지만 제이콥은 침묵하지 않았고, 그의 말에는 힘이 있었다. 매튜는 신께서 제이콥을 보내셨다고 믿는다고 말했고, 내가 제이콥은 신을 믿지 않는다고 말하자 매튜는 웃었다. 그게 바로 이 우주에서 그가 정확히 기대하던 것이었다고. 하지만 매튜는 제이콥 곁에서 싸우러 갔다.

제이콥의 말이 매우 강력해지자, 존의 사람들은 총알로 이에 응했다. 제이콥은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가 죽을 거라는 걸 알고나 있었을지 모르겠다. 아마 알고 있었겠지만, 그는 굴복하지 않았다. 난 제이콥의 몸이 쏟아지는 총알에 맞아 거의 산산조각나는 걸 보았다. 매튜가 그 옆에 쓰러졌고, 그 순간 나는 순교자들의 공포와 영광을 목격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그 때... 나는 말했다.

그 한 순간, 그 소중한 한 순간... 내겐 믿음이 있었다. 무언가 나 자신보다 거대한 것이 내게 닿았고, 상상조차 하지 못한 힘이 내게서 솟아나는 걸 느꼈다. 산을 움직이고, 거짓 선지자들을 끌어내리고, 방주를 차지할 힘.

그 한 순간, 우리는 바다가 되었다. 우리는 격랑의 울부짖음이 되었다. 우리는 부딪히는 파도가 되었다. 우리는 무한했고, 우리는 움직이며 우리 앞에 놓인 모든 것들을 쓸어버렸다. 그건 아름다웠고, 끔찍했다. 우리의 적은 파괴되었고 난 그들을 동정했다. 하지만 아무도 바다에 맞서 싸울 수는 없다는 걸 그들도 알아야 했다.

그리고 그 순간은 끝났고, 우리는 승리했으며, 나는 나 자신으로 돌아왔다.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아직도 모르겠다. 정말 내가 말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무엇을 경험했는지 생각할 틈이 없었다. 물이 들이닥치고 있었고 우리는 최대한 빨리 모든 걸 챙겨서 모두 승선해야 했다.

땅이 거의 사라져버린 마지막 순간, 방주 앞에 한 사람이 고독하게 서 있었다. 내 마지막 형제 바솔로뮤. 나는 그와 대화하기 위해 내려갔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의 눈빛으로 알 수 있었다.

그를 방주에 태워야 할까? 그를 남겨둬야 할까? 그에게 마땅한 건 구원일까, 종말일까? 그가 우리를 약속의 땅으로 이끌까, 아니면 파멸로 이끌까? 그는 생을 갈망했지만 스스로를 증오했다. 그는 도움이 되기를 원했지만 스스로가 무가치하다고 여겼다. 그는 그 자신을 벌주고 싶어했고, 파괴하고 싶어했지만, 동시에 그 자신에게 무언가 가치 있는 것, 무언가 신성한 것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는 사랑과 증오, 광기와 이성으로 차 있었다. 그는 선지자였고, 추방된 자였으며, 범죄자였고, 괴물이었고... 사람이었다.

내가 그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었을까? 내 기이한 여정과 수많은 실패, 그 한 순간의 믿음 끝에서... 내가 대체 무슨 말을 할 수 있었을까?

빌어먹을 배에 타.

 

내레이션  - Peter Wingfield

작가/감독 - Jonas Kyratzes

음악/음향 - Chris Christodoulou

커버 아트 - Daniele Giardini

Copyright 2021 Jonas Kyratzes & Chris Christodoulou

이 게시물은 비공식 팬 번역으로, 저작권은 올바른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땅이 가라앉음에 따라 바다는 더 가까이 기어들어왔고, 이내 감옥의 1층이 물에 잠기기 시작했다.

 

수감자들은 공황에 빠져서 감방에서 탈출하려 했고, 그러자 간수들이 총을 쐈다. 1층으로부턴 다시 어떤 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 우리가 풀려나는 일도 없었다.

음식이라고는 오래되고 곰팡이가 핀 빵 뿐이었다. 간수들의 절반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매튜는 끝이 가까워졌다고 생각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구원의 기회가 찾아왔다. 어느 날 밤, 반은 굶주리고 반은 잠이 덜 깬 채로, 우리는 버스에 실려 포장된 도로보다는 강에 가까운 길을 지나 산 속으로 이송되었다. 옛날 서부극에 나오는 죄수들처럼 서로 묶인 채로, 우리는 무언가 거대한 것이 지어지고 있는 공사장을 지나, 건조하고, 기분 좋게 따스한 식당으로 행진했다.

몇 주 만에 제대로 된 음식을 먹을 수 있었다. 손이 떨렸고, 우리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굶주린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평범한 식사도 기적이 될 수 있다는 걸 이해할 것이다. 문득 나는 이렇게 인간적인 장소에 있는 게 기쁘게 느껴졌다. 자연으로부터 벗어나, 계속되는 굶주림에서 벗어나, 이로 생살을 물어 뜯는 일에서 벗어나.

우리를 인간답게 만들어주는 것은 우리의 영혼이 아니라, 단지 우리가 직접 쌓아올린 세계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우린 삶을 굶주림과 공포 이상의 것으로 느끼게 해주는 것에 둘러싸여 있었고, 이는 우리를 사람답게 했다.

종교가 인공적인 것이 아니라는 걸 부정하기란 불가능했다. 그것은 특정한 시간과 공간의 산물이었으며, 문화와 정치에 의해 규정되었다... 하지만 결국 그 계략이, 종교가 보다 깊은 진실을 담고 있다는 정확한 이유라면? 우리는 언제나 자연에서 신을 찾았고, 성경이 우리의 이해를 벗어난 힘에 의해 쓰여졌거나 그 힘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 반대라면, 신께서는 인간의 형상으로써만 스스로를 드러내신다면? 만일 신성함이 동물로부터 우리를 구별짓는 이런 행동들을 필요로 하고, 우리는 창조주를 따라함으로써만 창조주를 이해할 수 있다면?

어쩌면 창조주라는 건 없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는 창조된 게 아니라, 스스로 창조한 것일지도 모른다.

내 생각은 경호원에 둘러싸인 사람 하나가 식당에 들어서고, 누군가 선지자께서 입장하신다고 큰 소리로 외침에 따라 중단되었다.

그들은 단지 신화 속의, 시간의 안개 속에 사라진 존재이기에, 직접 볼 수 없을 때 선지자의 존재를 믿기란 쉬운 일이다. 선지자라는 개념은 그럴싸하고 만족스럽다. 그런 존재가 있어야 한다는 건 거의 직감적으로 알 수 있다. 하지만 현실에서 마주친 선지자는 그저 한 사람의 인간이었다. 우리는 슈퍼마켓이나 화장실이 아닌, 사막이나 산꼭대기에 있는 선지자를 상상한다. 종교가 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개념들이 그렇듯이, 우리는 선지자가 은유로 머무를 때만 편안하게 여길 수 있다.

내가 본 사람 중 선지자에 가장 가까운 사람은 바솔로뮤였다. 그가 본 환영이 그를 미치게 만들었다. 그런데 이 선지자는 달랐다. 그는 비를 막기 위해 후드를 쓰고 있었고, 지팡이를 짚고 걸었다. 그는 백발의 턱수염을 길게 길렀으며, 밝고 푸른 눈은 사람의 핵심을 꿰뚫어보는 듯 했다. 우리 죄수들이 기쁘게 맛보고 있는, 그가 준비한 만찬장에 들어서는 그의 모습은 마치 신께서 직접 보낸 전령처럼 보였다.

그 사람은 존이었다. 당연히 그렇고 말고.

그가 한 첫 번째 행동은 우리의 구속을 풀어주는 것이었다. 우리는 가뿐하고 자유롭다고 느꼈고, 마치 우리의 인간성이 회복된 것만 같았다. 그러고는 존은 그의 비전에 대해, 세계의 종말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존은 어린 나이에 가족을 잃었다. 어머니는 암으로, 아버지는 알콜중독으로. 부모님의 죽음은 존을 영원히 바꾸어 놓았지만, 사람들이 으레 생각하는 방식으로는 아니었다. 그에게 영향을 미친 건 슬픔이 아니었다. 아이들은 슬픔을 이해할 수 있고, 슬픔은 서서히 지나간다

하지만 부모는 사랑 이상의 것을 준다. 그들은 아이와 세계의 고통 사이를 가로막아 주는 장벽이다. 부모가 있을 때, 당신에겐 롤 모델이 있다. 당신은 규칙들과 조리에 맞는 전통으로 이루어진 삶의 방식이 있다고 믿을 수 있다. 부모가 있을 때, 당신은 맥락을, 당신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이야기를 갖는다. 부모가 있을 때, 당신은 죽음을 기다리는 줄에 서지 않는다. 아직 시간이 남아있고, 죽음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없다.

부모가 사라지면, 이 모든 것이 무너진다. 당신은 규칙과 전통은 제멋대로라는 걸 깨닫고, 당신의 존재가 각주에 불과하다는 걸 깨닫는다. 그리고 당신 존재가 사라지기 바로 직전의 그 순간, 당신은 스스로가 완전히, 견딜 수 없을 만큼 혼자라는 걸 깨닫는다.

그게 존이 어린아이였던 시절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리고 아무리 많은 훌륭한 어른들도 그가 혼자가 아니라는 환상을 되찾게 해주지는 못했다. 외로움은 언제나 그곳에 있었다. 언제든 표면으로 뛰어오를 준비가 되어있는 존재론적 공포. 그는 계속해서 죽음의 순간에 대해, 그의 부모가 겪었을 그 순간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죽음이 가까이 다가오는 매 순간을 헤아렸다.

그러지 않기 위해 그는 술을 마셨고 약을 탐닉했으며, 더 극단적인 행동으로 자신을 내몰았다. 규범을 파괴하고, 잘못된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일을 저지르는 건 존에게 통제력이 있다고 믿게끔 했다. 그의 삶에 아무런 의미가 없더라도, 적어도 맛은 느껴진다고. 하지만 그 맛도 금세 사라져버렸다.

어느 날, 집으로 가는 길에 술에 취해 운전하던 그는 운전대를 놓쳐 사람을 거의 죽일 뻔했다. 잔해에서 기어나오면서, 피와 토사물로 덮인 진흙에서 스스로를 끌어내면서, 존은 그제서야 자신이 얼마나 타락했는지 깨달았다. 그는 스스로를 돌아보았고 자신이 얼마나 이 끔찍하고 이기적인 생명체를 증오하는지 깨달았다.

그 순간이었다. 참담한 외로움과 존재의 고통이 존을 압도할 때, 그는 신의 따뜻하고 사랑에 찬 포옹을 느꼈다. 그는 그럴 만큼 가치 있는 일을 하지 않았지만, 어쨌든 그건 그랬다. 영원하고 절대적이었다. 그 때 존은 자신 앞에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 아주 큰 고통을 겪어야만 하는 머나먼 길이 놓여져 있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닐 것이었다.

그의 삶에 신을 받아들이자 모든 것이 바뀌었다. 존은 그가 그랬던 것처럼 길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그들을 돕는 데 헌신하기로 했다. 그 자신이 습관을 떨쳐내느라 애썼고 믿음에 충실하려 노력했기 때문에, 존은 그 일이 어려운 일이 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 어느 누구에게라도 회개의 기회를 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대홍수가 닥치자, 신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신께서는 존의 삶에 큰 성공을 축복하셨다. 존은 시장들과 친교를 나눴고 대통령에게 조언을 했다. 그러나 그에게 쏟아진 그 모든 영광에는 이유가 있었다. 이제 그가 빚진 것을 갚고, 인류를 구할 때였다.

신께서는 그에게 방주를 만들라고 명하셨다.

그래서 우리를 이곳으로 데려 온 것이다. 사회는 우리를 하류 중에서도 하류로 여겼지만, 존은 우리에게도 신께 자신을 증명할 기회가 주어질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는 우리 중 많은 이들이 열심히 일하고 희생하여, 신의 사랑을 경험할 수 있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우리조차도 구원 받을 수 있다고.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고, 죄수들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보았다. 결국 이게 우리가 간절히 바라던 것이었다. 혼자 되지 않는 것. 진실이나 지혜가 아니라, 그저 우주적인 고독을 끝마치는 것. 우리와 함께할 목소리, 어둠 속에서 우리를 지켜줄 따스한 포옹. 우린 그걸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것이었다. 나 자신도 포함해서.

물론, 난 존을 알고 있었다. 나는 존이 늘 부유하고 연줄이 많은 집안의 골칫덩어리였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정말로 교통사고를 내서 사람이 죽었더라도, 존의 아버지가 사건을 은폐했을 것이었다. 존에게 종교란 직업이었고, 선지자가 되는 건 궁극적인 승진이었다.

그리고 그럼에도,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믿고 싶어했고, 안전하다고 느끼고 싶어했고 사랑받고 싶어했다. 내가 그들에게 무얼 줄 수 있겠는가? 저 선지자는 사기꾼이고, 이 세계에 진짜 선지자가 있다면 그건 바솔로뮤라고 말했어야 했을까? 신께서 그들을 광인에게로 이끌기 위해 살인자를 보내셨다고?

그래서 나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고, 매튜에게도 그러도록 했다.

존은 우리를 알아보지 못했다. 우리는 조용히 식사를 끝마쳤고, 다음 날 아침 우리는 방주를 짓기 시작했다.

 

내레이션  - Peter Wingfield

작가/감독 - Jonas Kyratzes

음악/음향 - Chris Christodoulou

커버 아트 - Daniele Giardini

Copyright 2021 Jonas Kyratzes & Chris Christodoulou

이 게시물은 비공식 팬 번역으로, 저작권은 올바른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굶주린 자들을 위한 음식도, 집 없는 자들을 위한 피난처도 없었다.

 

거리에는 죽은 자들이 떠다녔고 부유한 자들은 펜트하우스에서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하지만 사법 시스템은 계속 작동했다.

나는 투옥되는 일에 반발하지 않았다. 나는 사람을 죽였고, 더 끔찍하게도 그 일을 후회하지 않았다. 사이먼의 눈에 떠오른 공포와, 그가 다른 이들에게 명한 운명을 그 스스로는 받아들이지 못하고 떨어지면서 내지른 비명은 다른 사람들이 더 뛰어내리지 못하게 막는 데는 충분했다. 그리고 내 기분은... 괜찮았다.

사람들이 날 감방에 처넣었을 때, 나는 웃었다. 쓴웃음이었지만, 동시에 나는 기이하게도 평화로운 기분을 느꼈다. 어쩌면 난 바솔로뮤처럼 미쳤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이게 내 길인지도.

물론 내 꿈에는 사이먼의 얼굴이 나타났다. 때로는 토마스의 얼굴이기도 했지만. 그는 비명을 질렀고 나는 고통을 느꼈지만 후회하지는 않았다.

다른 죄수들은 겁에 질려서, 이내 우리는 감방에 갇힌 채 물에 빠져 죽도록 내버려질 거라고 믿고 있었다. 그들이 맞을지도 몰랐지만, 여전히 나는 평온했고 동떨어진 기분이었다. 충격에 빠져 있었을 땐 전혀 느끼지 못했던 감정이었다. 난 깨달음을 얻었다고 생각했고, 어쩌면 그게 맞을지도 몰랐다. 누가 그걸 분별할 수 있겠는가?

곧 매튜나 존을 만나게 되리라고 확신했다. 잊힌 형제들을 찾겠다고 결심했었다. 이제 길은 세워졌고, 어떠한 힘이 나를 한 형제에서 다른 형제로 이끌고 있었다. 아니면 내가 미쳤기에 그렇게 느끼는지도 몰랐다.

간수들은 나를 싫어했다. 하지만 사실 간수들은 모두를 싫어했다. 그게 정당화되었을지라도 다른 사람의 자유를 빼앗는 것은 언제나 죄악임을 마음 깊이 알고 있었기에. 반면 죄수들은, 최악의 범죄자라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알고 있었기에 숭배와 겸손으로 나를 대했다.

어느 날, 나이든 죄수 한 사람이 내게 다가왔다. 그는 내 믿음에 대해서 물었다. 그는 진심이었지만, 그를 알아보았기에 난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 사람은 매튜였다

그가 나를 알아보고, 내가 왜 감방에 갇혔는지 말해 주었을 때, 매튜는 당황했다. 그는 내가 그렇게 심각한 범죄를 저질렀다는 걸 믿지 못했다. 우리는 몇 십 년간 서로를 만나지 못했으나, 그는 내가 잘못을 저지를 사람이라고 믿지 않을 만큼 나를 잘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난 내가 저지른 짓이 확실하다고 말했지만, 그게 잘못인지는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가 물었다, "생명이 신성하다고 믿지 않는 거야?" 난 매튜에게 그 어느 때보다도 그렇게 믿고 있다고 말했고, 그래서 사이먼을 죽인 거라고도 말했다.

하지만 매튜에 대해서는? 내 이야기는 따분했다. 난 그의 사정을 알고 싶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매튜를 보았을 때 그는 학업을 내던지고 믿음을 포기했었다. 가 어쩌다 여기로 오게 되었을까?

그는 먼 곳을 바라보더니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매튜는 언제나 의심을 품었다. 선량한 신의 존재를 믿기에는 이 세상이 너무나 잔혹해 보였다. 매튜의 어머니는 그가 어릴 때 죽었고, 매튜는 어머니가 천국에 있기를 바랐지만 많은 순간 그는 어머니가 땅 속에서 썩어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매튜는 어머니의 썩어가는 시체를 상상했고, 그런 공포가 들이닥칠 때면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가장 가까이에 있는 성경을 집어들고 기도를 올리는 것이었다. 나아갈 힘을 주었기에 그는 믿음을 받아들였지만, 언제나 자신이 사기꾼이 된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교회에 일생을 헌신하는 것이 그를 좀먹는 의심을 넘어설 수 있게 해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 대신에 그는 함정에 갇힌 것처럼 느끼기 시작했다. 믿음은 존재를 견딜 만하게 해주었지만, 그는 살고 싶기도 했다. 사랑에 빠지고, 아이를 갖고, 신의 사람이 아니라 속세의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매튜는 떠났다. 어려운 일이 될 거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쉬운 일이었다. 마치 어깨에서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것처럼 가뿐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는 메리를 만났다.

메리는 사서였고, 매튜는 메리에게 첫눈에 반해버렸다. 그녀는 아름다웠고, 똑똑했으며, 무엇보다도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메리처럼 자신을 그렇게 많이 웃게 하거나, 그의 재치를 생생히 살리는 사람을 만난 적이 없었다. 모든 대화가 짧은 춤 같았고, 그는 전에 없던 확신을 갖고 말할 수 있었다. 연인 사이에 나누는 아주 작은 농담이 천 번의 설교보다 더 많은 진실을 담고 있었다.

황홀경에서 평화까지, 믿음이 줄 수 있다고 여겨진 모든 것들을 매튜는 메리의 존재만으로도 느낄 수 있었다. 그의 삶에는 의미가, 목적이 있었다. 그 어떤 영적 소명보다도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이 함께할 때면, 매튜는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을 알았다. 그는 단지 더 나은 사람이 된 게 아니었다. 그는 막대한 친절함과 이타심을 베풀 수 있는 아주 다른 사람이 되었다.

그건 단지 욕정에 불과하다고, 혹은 시간이 지나면 그 감정은 사라질 거라고 냉소적으로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종종 그렇듯이 그들은 틀렸다. 매튜는 아내 인생의 모든 나날에 온 힘을 다해 그녀를 사랑했다.

그리고 메리는 죽었다.

그렇게 갑자기 매튜는 혼자가 되었다. 메리의 물품들은 그대로 있었고, 그 향기는 집에 맴돌았지만, 그녀는 사라졌다.

매튜의 마음은 반으로 쪼개진 것 같았다. 현실은 말이 되지 않았고, 진실은 서로와 화해하지 못했다.

절대적인 확신으로, 그는 알고 있었다. 그녀는 이제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다시 만날 수 없을 것이다. 그녀는 죽었고, 그녀의 모든 것은 둔하고 목적 없는 물질로 녹아버렸다. 메리는 매튜의 어머니처럼, 아버지처럼, 지나간 모든 세대의 인간들처럼 무덤 속에서 썩어가고 있을 것이다.

절대적인 확신으로, 그는 또한 알고 있었다. 그녀는 아직 존재한다는 걸. 매튜는 영혼을 믿지 않았지만, 메리를 믿었다. 그들의 유대는 사라지지 않았다. 매튜는 매일 매 순간마다 그걸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녀를 알았다. 그녀를 상상할 수 있었다. 어떤 밤에는 그녀를 거의 만질 수 있을 것처럼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메리를 다시 만날 수 없다는 걸 믿을 수도, 그녀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 누구라도, 심지어 신일지라도, 그들의 유대를 깬다는 생각만으로도 그를 분노하게 했다.

사람들이 그에게 이만 놓아주라고 하면, 그는 그렇게 불가능할 정도로 끔찍한 것을 받아들인다는 비겁한 어리석음에 격분했다. 받아들일 수 없었다고 그가 말했다. 죽음을 받아들이는 건 지혜가 아니었다. 그건 반역이었다.

그는 자살할 생각도 했었다. 그렇게 해서 아내를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게 확실했다면 그는 망설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매튜는 여전히 살고 싶었다. 왜냐하면... 또 무엇이 있겠는가?

멈추는 건 잘못된 일 같았기에, 계속해서 그는 기묘하고 기계적으로 스스로를 먹여 살렸다. 우주에 굴복하는 걸 거부했기에 그는 계속해서 숨을 쉬었다. 그리고 대륙이 가라앉기 시작했고, 모든 것이 무너지기 시작했고, 여전히 그는 나아갔다. 그가 굶주린다면 메리가 화를 낼 것이었고, 죽음은 이미 그에게서 충분히 많은 것을 앗아갔기 때문이었다.

결국 어느 날 그는 침수된 슈퍼마켓에서 참치 통조림 몇 캔을 훔친 죄로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다. 신은 죽었을지도 모르지만, 맘몬은 살아있었고, 그에게 자비는 없었다.

매튜는 내가 답을 갖고 있기를 바랐다. 모든 조각을 맞추어 완전한 형태로 만들 수 있는 방법을 내가 알고 있을 거라고. 하지만 난 그가 내 길의 다음 여정이 되기를 바랐다. 내가 저지른 짓을 정당화할 방법을 그가 말해줄 수 있을 거라고. 내가 무슨 말을 하든, 내 꿈에는 사이먼의 얼굴이 나타났고 그 고통은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거기 앉아있었다. 침몰하는 세계의 두 늙은이들. 종말이 다가오고 있었지만, 우리는 죽기를 거부했다. 우리에겐 믿음이 없었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믿었다

생명은 신성하다. 죽음은 그 적이다. 하지만 애초부터 언제나 패배할 수밖에 없는 싸움이라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사랑조차도 바다에 힘을 미칠 수는 없었다. 그리고 결국, 바다가 모든 것을 집어삼킬 것이다.

 

내레이션  - Peter Wingfield

작가/감독 - Jonas Kyratzes

음악/음향 - Chris Christodoulou

커버 아트 - Daniele Giardini

Copyright 2021 Jonas Kyratzes & Chris Christodoulou

이 게시물은 비공식 팬 번역으로, 저작권은 올바른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도시로 돌아왔을 때, 사람들은 바다로 몸을 던지고 있었다.

 

제이콥의 낡은 자동차에서 라디오로 그 소식을 들었다. 리포터는 젊었고, 혼란에 빠져 있었으며, 분명 전문가는 아니었다.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고지대로 피신했다. 상황을 묘사하면서 리포터의 목소리는 갈라졌다. 그녀는 사람들에게 멈추기를 간청했다. 아무리 많은 사람들을 제물로 바치더라도 바다를 달랠 수는 없다면서. 그리고 그 즉시 나는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녀의 말이 닿기를 간절히 바라는 사람에게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마도 어리석고 절망적인 일이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너무나 사람다운, 믿음에서 우러난 행동이었고, 그녀의 고통이 마치 내 것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녀를 돕고 싶었지만... 내가 그럴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인가? 나 자신의 문제도 풀지 못했는데.

하지만 그 때 깨달았다. 나는 아직도 생명은 소중하다고 생각한다는 것을. 우리가 살아가는 우주는 두려웠고, 우리가 쌓아 올린 사회는 혐오스러웠으며, 이제는 믿음과 망상의 경계를 구분하지 못했지만, 이 모든 걸 내던진다는 생각은 차마 견딜 수 없었다. 그렇기에 죽음은 내게 너무나도 두렵게 느껴졌다. 내 존재의 종말을 받아들이는 건 불가능했다. 비록 이런 식으로라도 살아있다는 것은,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하고 가치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만일 돕고자 하는 내 열망에 빈틈이 있다면? 내게 확신보다 공포가 앞선다면, 신이 내 곁에 있다고 믿었던 때에 가지고 있던 그 불꽃이 내게서 사라져 버렸다면? 내 인생이 멀리서 일어난 일이고, 나는 아무것도 관여하지 않은 것처럼 방관하는 느낌을 멈출 수가 없다면?

... 그런다고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누군가는 시도해 봐야 했고, 그게 나일지도 몰랐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가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한 사람들을 찾으러 갔다.

그런 수 백 명의 사람들이 대학에 모여 있었다. 캠퍼스의 절반은 이미 물에 잠겼고, 거대한 파도가 주 건물에 부딪히며 창문을 깼고 실내에 물이 들이치고 있었다. 옥상에서는 밝은 옷을 차려 입은 젊은이들이 안개 속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난 삶을 버릴 준비가 된 절망한 영혼들의 행렬을 보게 되리라 생각했다. 그 대신에 내가 본 것은 축제였다. 여기 이 옥상은 가라앉고 있는 이 세상의 그 어디보다 더 다채로웠고, 더 즐거웠으며, 더 희망에 차 있었다.

사람들은 춤추고 웃고 서로 손을 잡으며 노래하고 박수를 쳤다. 젊은이와 노인을 막론하고, 이 신성한 의식에 함께 모인 그들의 눈은 믿음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는 한 사람씩 옥상 가장자리로 떨어졌다.

누군가 떨어지면서 비명을 질렀더라도 음악과 파도 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난 그들을 말리러 왔지만, 이내 진실과 그들의 솔직한 믿음에 홀리고 말았다. 사람이 자기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각주:1]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살아갈 수 있도록 이 사람들은 자기 목숨을 내놓고 있었다. 물 속으로 자기 몸을 던져 어딘가의 누군가가 살아 남을 수 있도록. 사랑과 용기, 그리고 관대함의 최고에 이른 행위.

내가 본 가장 기괴한 광경이었다.

난 춤추는 사람들 사이에 서 있는 사람을 알아보았고, 그건 분명 운명이었다. 토마스, 제이콥, 그리고 바솔로뮤에 이어, 사이먼을 마주친 것에 대해 달리 어떤 설명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는 어디에나 있을 수 있었지만, 그는 바로 여기 있었다. 그리고 사이먼이 이 사람들을 이끌었다. 이게 과연 또 다른 우연일 수 있었을까?

그 질문의 답은 '그렇다'임을 나는 알고 있었다. 세상은 아무 의미 없는 우연으로 가득하니 물론 이것도 우연이라고. 하지만 그 순간에, 나는 이 우연에 어떤 의미가 있다고 믿기를 택했다. 나는 그것에 의미가 있는 것처럼 행동했다. 마치 신께서 내게 임무를 부여한 것처럼, 그리고 갑자기 나는 나아갈 힘을 얻었다.

내가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한 걸까? 말장난을 통해서만 존재하고, 위선과 자기기만을 포용함으로써만 존재하는 신은 진정한 신이 아니었다. 하지만 내게 샘솟은 힘은? 그게 진짜라면,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사이먼은 날 기억했지만, 그는 마치 낯선 사람 같았다. 내가 알던 사이먼은 순수하고 열정에 찬 사람이었다. 어설프고 실수를 자주 저질렀지만, 언제나 무엇이든 시도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그는 우리 중 그 누구보다도 복음서의 신학보다 도덕에 충실했다. 그는 그렇게 느꼈기에 그렇게 믿었다.

그리고 지금은? 이 사이먼은 달랐다. 그의 열정은 여전했지만, 그 밑바닥에는 무언가 거칠고 취약한, 증오에 가까운 응어리가 깊이 자리하고 있었다.

신의 말씀을 설파하기 위해 온 세계를 여행했다고 그는 말했다. 사람들에게 옳은 길을 보여주기 위해 그가 가진 모든 것을 다했다고. 몇 년 동안 그는 타의 모범이 되려 노력했고, 모든 사람들에게 선함이 있다고 이해시키기 위해 애쓰면서 떠돌았다.

사이먼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비웃었다. 사람이 죄를 끊어내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으며 그는 얼마나 많은 시간을 허비했던가? 수 십 년 간 그는 애쓰고 또 애썼지만, 사람들은 언제나 그를 실망하게 했다. 사람들은 신을 찾았을 때조차 그들의 결함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들은 실수를 되풀이했고, 세상의 모든 참상은 수그러들지 않고 이어졌다.

그는 어느 분쟁지역에 있었다고 말했다. 이미 오래 전에 전쟁이 시작된 지 한참 뒤에 태어난 군인이, 살면서 평화라고는 알지 못하는 소년병들과 싸우도록 보내지는 곳에서. 그는 사람들에게 더 나은 사람이 되라고 가르쳤다. 그들의 삶에 신을 받아들이고 신의 자비를 받아들이라고

하지만 살인은 멈추지 않았다. 사이먼이 말했다, 그건 사람의 진심에서 우러나왔기에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었어.

한 사람씩, 사람들은 뛰어내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떨고 있는 노인도. 가슴에 책 한 권을 품은 소녀도. 열 살이 채 넘지 않은 것 같은 소년도. 정장을 차려입고 웃으면서 울고 있는 여자도. 그 모든 사람들에겐 무언가 있었고, 그들의 눈에는 무언가 담겨 있었다.

이해하는 데 너무나 오래 걸렸다고 사이먼은 내게 말했다. 진실을 알게 되면 무너져 버릴까봐 진실에 저항했다고. 하지만 어느 날, 사이먼은 산 속 높은 곳에 있는 마을에 도착했다. 설교를 하러 간 것이었지만 마을 사람들은 모두 죽어있었다. 그래서 그는 황야로 떠났고, 그곳에서, 구름의 가장자리에서 그는 깨달음을 얻었다.

우리는 이렇게 많아서는 안 되었어, 사이먼이 말했다. 신께서는 오직 두 명의 사람들만을 만드셨어, 그의 창조물이 균형을 이루기 바랐기 때문이지. 하지만 우리는 오만에 차서 금단의 과실을 먹어버렸어.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은 미지를 이해하고 정복하기 위해서.

우리는 신이 창조하신 겨우 일부분에 불과해, 그게 그 분의 의도이지. 나무와 새와 바다의 물고기들은 인류만큼이나 소중해. 아니, 그보다 더 소중하지. 그들은 진정으로 순수하니까. 그들은 그 사실을 몰라. 알 수가 없지.

젊은 남자 하나가 머뭇거리더니, 곧 떨어졌다. 늙은 여자 하나가 뒤따랐다. 떨어지면서 그녀는 노래를 불렀다. 난 그들의 삶이 담긴 섬세한 직조물을 상상하려 했다. 친구들, 적들, 사랑하는 이들, 미워하는 친척들, 가장 좋아하는 책, 위태로웠던 시절, 행복했던 시절... 모든 것이 소중했고, 모든 것이 죽음의 무의미한 허무에 비하면 한없이 귀중한 것이었다

우리가 무엇인지 깨달아야 해, 사이먼이 말했다. 우리는 신의 가장 큰 실패작이야. 우리는 죄인으로 태어났고 모든 숨결마다 창조의 아름다움을 파괴하고 있어. 땅은 우리의 무게를 못 이겨서 가라앉는 거야. 지구는 우리의 얼룩을 정화할 필요가 있어.

사이먼은 건물 가장자리로 나를 데려갔다. 사람들이 떨어지는 걸 보기 위해서. 그는 파도를 가리켰다. 이게 우리가 회개할 수 있는 길이야, 그가 말했다. 만일 우리가 스스로의 오만을, 죄악을, 여전히 순수한 저 피조물들에 비하면 우리가 보잘것없음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희생을 통해 세계를 구할 수 있어.

난 파도를 바라보았다. 파도는 회색빛이었고, 더러웠으며, 시체와 진흙으로 가득했다. 만일 이것이 신의 의지라면, 난 거부하겠다. 그리고 만일 이것으로 하나의 생명을 구할 수 있다면, 나는 신의 모든 창조를 거부하겠다. 나무와 새와 바다의 물고기들은 한 사람의 아름다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이제 이곳에서 그들이 죽어가는 걸 보면서, 나는 그들의 눈에서 본 것이 무엇이었는지 깨달았다. . 존재한다는 죄. 사람이라는 죄. 그리고 내 안에서 깨어난 힘은 이제 분노로 불타고 있었다.

사이먼은 미소지으며 뛰어 내리는 사람들을 축복했다. 그가 사람들을 이곳으로 데려왔다. 그들의 좋은 의도를 자기 파괴로 뒤틀고, 오래된 거짓말을 새롭게 팔아넘겨서. 모든 것이 너의 잘못이니, 수치스러운 줄 알라.

하지만 난 수치스럽지 않았다.

그래서 난 사이먼을 밀어 버렸다.

 

내레이션  - Peter Wingfield

작가/감독 - Jonas Kyratzes

음악/음향 - Chris Christodoulou

커버 아트 - Daniele Giardini

Copyright 2021 Jonas Kyratzes & Chris Christodoulou

이 게시물은 비공식 팬 번역으로, 저작권은 올바른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1. (역주) 요한복음 15:13 [본문으로]

 

깨어있는 모든 순간에 천사들의 움직임을 알 수 있었기에, 바솔로뮤는 믿음을 가질 필요가 없었다.

 

그가 그것들을 설명하려 할 때면 우리는 그를 비웃고는 했다. 바로 우리가 신의 종이었음에도 말이다. 그리고 시간이 좀 지나자 바솔로뮤는 설명하기를 포기하고 속으로만 간직하기로 했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나 땅이 바다로 가라앉기 시작하자, 나는 그를 찾으려고 했다. 그의 환영이 내 신앙심을 되찾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라면서. 그는 성직자를 필요로 하는 외딴 마을로 이주했다. 사람들은 내게 가지 말라고 했다. 길은 비에 쓸려 나갔고, 곧 골짜기 전체가 물에 잠길 거라면서.

하지만 이 경고에는 숨겨진 의미가 있었다. 바솔로뮤의 무언가가 그 사람들을 불편하게 했다. 그에게 가까이 가지 말라, 그들은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그런 사람에게는 뭔가 잘못된 게 있다고

우리는 신을 믿는 사람들을 존중하지만, 신을 보았다는 사람은 미치광이로 여긴다. 사실, 신을 보았다는 사람들 대부분은 미치광이였다. 그래서 신앙을 가진 사람들조차도, 신을 실재하는 것이 아닌 추상적인 개념이나 느낌, 혹은 먼 미래에 우리가 도달할 유토피아로 여기면서 살아간다. 우리 삶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신에게 말을 건다고 생각해보라. 텅 빈 하늘에 빌면서 모든 사건을 무언가의 응답이나 상징으로 절박하게 여기며 기도하는 게 아니라, 그를 실제로 마주 본다고 생각해보라. 신이 당신 머릿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에 깃든 게 아니라, 바로 당신 앞에 분리된 실체로 나타나 당신과 한 방에 있다고 상상해보라.

그는 아주 오래되었다. 그는 수 억 명의 사람들을 죽였고 그보다 훨씬 많은 수의 동물들을 죽였다. 그는 산불과 지진, 폭풍을 일으켰고 이제 세계를 물 속에 가라앉히고 있다. 그는 생명을 창조했다. 그는 죽음을 창조했다. 그는 모든 것을 창조했으나, 이런 식으로 만들기를 택했다. 고통과 비참함과 초월과 희망으로 가득한 세계.

그런 존재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 존재가 당신에게 말을 한다면, 과연 그걸 이해할 수나 있을까? 아니면 그저 흘깃 바라본 것만으로도 당신의 정신을 무너뜨릴까?

바솔로뮤는 평화를 찾아 도시를 떠났다. 천사들은 전언들로 그를 괴롭혔고, 바솔로뮤는 강과 숲 사이 어딘가에서 천사들의 목소리가 새들의 노랫소리에 어우러지기를 소망했다. 나는 제이콥에게서 빌린 다 망가져가는 낡은 자동차를 타고 골짜기로 향했지만, 마음을 가라앉혀줄 만한 풍경은 끊임없이 내리는 비에 사라져버리고 없었다. 고요히 흐르던 강은 세찬 급류로 바뀌었고, 내가 만난 사람들은 반대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

내가 바솔로뮤에 대해 물으면 그들은 똑같이 대답했다. 그가 저지른 짓을 모르십니까? 몇몇 사람들은 그가 저지른 범죄에 분노해서 그가 죽기를 바랐고, 다른 사람들은 동정심을 보이면서 그가 잡히기만을 바랐다. 하지만 바솔로뮤를 찾을 수는 없었다. 그는 빗속을 헤매며 울고 신을 향해 부르짖고 있을 것이었다.

돌아갈 생각도 해봤다. 차는 도로의 물살을 힘겹게 헤치고 있었고, 나는 죽을 생각이 없었다. 그렇지만 누군가 바솔로뮤의 교회에 대해 말해준 무언가가 나를 계속 나아가게 했다. 어쩌면 바솔로뮤가 어째서 그런 짓을 저질렀는지 내가 그 답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 같다. 내가 알던 바솔로뮤는 연민이 강한 사람이었다. 세상이 종종 그를 형편 없이 대할 때조차도.

우리가 종종 그랬을 때도.

내가 기억하는 바솔로뮤는 특출난 재능을 가진 화가였다. 그의 그림은 아주 강렬했고, 그 금빛 색채와 날개 달린 형상의 행렬은 동방 정교회의 이콘을 떠올리게 했다. 어쩌면 우리 중 누구도 그의 말을 듣지 않았기에 그 그림들이 바솔로뮤의 마음 속에 범람하는 천상의 전언들을 표출하는 유일한 창구였을지도 모르겠다.

바솔로뮤의 교회에 발을 들였을 때, 나는 그제서야 그의 엄청난 재능과 광기의 깊이를 깨달았다. 벽에서부터 천장까지, 교회의 내부 전체가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아름다움과 공포를 담은 하나의 선명한 그림이었다.

새카맣고 뒤틀린 형상들에 얽힌 금색과 붉은색의 풍부한 색채로써, 그는 신성한 환영의 모든 힘을 포착했다. 그걸 보자 나는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다른 반응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나는 글자들을 보았다.

작고 섬세한 글씨들이 형상들을 따라 공간 속에 물결치며 이어졌고, 천장을 향해 상승하고 있었다. 어디가 시작 지점인지 알아내는 건 불가능했기에, 나는 한 지점을 골라 읽기 시작했다.

그것은 다음과 같았다.

악마는 심판 받을 수 없다. 악마는 태초부터 존재했으며, 천사들만큼이나 신의 뜻을 잘 이해한다. 악마들은 모든 공포에서 아름다움을 찾아낸다. 악마의 환영에는 죄가 없다. 그것은 신의 끔찍한 위엄을 계시하는 것이며, 이는 신께서 의도하신 바이다. 신께서는 천사들의 날개를 만들 때 그랬듯이 악마들의 뿔을 섬세하게 만드셨으며, 그리하여 지상에서 악마들이 신의 목적을 이루게 하셨다.

악마는 증오스러운 존재가 아니다. 아름다움을 섬기는 그들의 본성을 따라 행하기 때문이다. 악마는 어리석음 속에서 현명하며, 방종 속에서 순수하다. 악마는 고통을 가져오지만 고통받지 않는다. 독수리가 비둘기의 살점을 찢을 때, 그것은 신성한 왕국의 영광을 보여준다.

악마는 부서지지 않으니 동정의 대상이 아니다. 악마는 천사들의 부서지는 왕국에 있는 그 어느 것보다도 완전하다. 악마는 사악하나, 행하는 악이 행하지 않는 선보다 낫다.

나는 대홍수가 시작되고 나서 악마와 수많은 대화를 나누었고, 그는 내게 지옥의 수많은 지혜를 전수해 주었다. 그 대가는 끔찍했으나, 악마는 후회하지 않는다. 그것이 신의 뜻을 행하기에.

천사들은 항상 하던 일을 한다. 그들은 영원의 종이다. 평생을 바쳐 천사들을 이해하고자 했으나, 결국 그들의 말은 무의미했다. 그들은 무척이나 아름답고, 상상 이상으로 강력하지만, 세계가 죽도록 내버려둘 것이다.

악마는 에너지의 산물이다. 그들은 먹고, 파괴하며, 변화한다. 악마는 변화를 이해하기에, 천사들이 볼 수 없는 진리를 볼 수 있다. 악마는 세계를 구할 방법을 알고 있고 내게 그 방법을 말해주었다.

그러나 나는 그저 한 사람의 인간에 불과하다. 나는 천사들의 노랫소리에 귀가 멀었고 악마의 지혜가 나를 불태우고 있다. 나는 완전하고 자유로워지기를, 이 끝없는 환영이 내게 지운 짐에서 벗어나 내 영혼이 깃털보다 가벼워지기를 바란다. 나는 진리의 무게를 감당할 수 없고 매일 신께 나를 풀어줄 것을 간청한다. 어째서 내가 선택받았는가?

거기서 나는 읽기를 멈추었다. 폭풍이 창문 하나를 깨뜨렸고 나는 최대한 빨리 그 곳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글자들은 끝없이 이어졌다. 또 뭐라고 쓰여 있었을까? 바솔로뮤가 진실을 말할 수 있었을까? 그가 세계를 구할 방법을 알고 있었을까? 다른 상황이었다면 어처구니 없어 보였겠지만, 그 교회에서 그 놀라운 그림에 둘러싸였을 때는, 나는 그를 거의 믿을 수 있었다.

그게 아니라면 그건 바솔로뮤가 저지른 범죄에 대한 변명일지도 몰랐다. 그 자신을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로 만들기 위해서. 그것도 아니라면 훨씬 더 간단한 설명은 그가 미쳤고 그 모든 것엔 아무 의미도 없다는 것이다.

도대체 어느 신이 그렇게 끔찍한 일을 저지르고 다닌 미친 사람에게 구원의 길을 보여준다는 말인가? 그건 질 나쁘고 잔인한 농담 같았다. 하지만 아마도 답은 있었다. 자기 아들의 죽음을 요구하는 부류의 신.

어떤 것도 말이 되지 않았고, 만일 말이 되었다면 그 진실은 감당하기엔 너무 괴로웠다. 바솔로뮤가 해방되기를 원한 걸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가 창조한 것의 아름다움, 그 금빛 이미지들에 담긴 초월성을... 어떻게 모두 부정한다는 말인가? 만일 이것이 신의 의지가 현현한 것이라면? 만일 이것이 기적이라면?

도시로 돌아왔을 때, 골짜기는 물 밑으로 사라졌다.

 

내레이션  - Peter Wingfield

작가/감독 - Jonas Kyratzes

음악/음향 - Chris Christodoulou

커버 아트 - Daniele Giardini

Copyright 2021 Jonas Kyratzes & Chris Christodoulou

이 게시물은 비공식 팬 번역으로, 저작권은 올바른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나는 항구가 파도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떠났다.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나는 오늘 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내륙으로 피난을 갈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도시에 머무를지 궁금했다. 물 속에 가라앉은 건물들을 보는 건 어떤 영향을 미쳤다. 그건 마치 진술과도 같았다. 모든 것이 사라진다. 모든 것이 부스러진다.

그 자리에 홀로 서서, 나는 온몸이 견딜 수 없이 긴장되는 것을 느꼈고, 이제 그 어느 때보다도 신앙심이 그리워졌다.

그리고는 깨달았다, 종교란 이야기라는 걸. 아주 강력한 힘을 가지고, 나를 위로하고 희망을 주는 이야기. 그러나 여느 다른 이야기들처럼 종교 역시 불신의 유예를 필요로 했다. 그것이 단지 이야기라는 걸 깨닫고 나면, 그 즉시 그 마법은 사라지고... 그걸 다시 되찾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그렇지만, 나의 일부는 신앙심을 되찾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내가 진정으로 믿었다고 느꼈을 때, 그리고 때로는 정말로 믿고 있었을 때의 그 기분이 지금의 내 기분보다는 훨씬 나았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기 위해 삶에 의미가 있다고 느끼는 건 안전장치와도 같았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담요를 두르는 것 같았다. 난 그 기분을 기억했고, 그 심리 상태를 기억했다... 마치 손에 닿을 것처럼 가까이에 있었다... 올바른 생각의 열차를 따라가서 올바른 말을 듣기만 한다면 그 상태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었다. 깨어난 뒤에 꿈을 이어서 꾸는 것처럼.

하지만 현실은 부정하기에는 너무 냉혹했다. 내가 내쉬는 모든 호흡이 나는 그저 또 다른 유산소 유기체라는 사실을 떠오르게 했다. 모든 지진이 내가 우주를 떠다니는 바위 위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떠오르게 했다. 거리로 천천히 기어오는 파도를 바라보면서, 돌을 깎아내는 물에 대해 생각하면서, 나는 시간의 무시무시한 규모에 대해 이해했다. 몇 백 억 년은 되는 우주에서, 이 천 년 전에 십자가에 매달려 죽은 한 사람의 인간이 신의 유일하고 참된 현신이라고 믿기란 불가능했다.

그건 좋은 이야기였다. 최고로 좋은 이야기 중 하나였다. 하지만 파도만큼 현실적이지는 않았다.

아니, 그랬던가? 진정한 진실의 알맹이를 조금이라도 쥐는 것이 가능할까? 그 아늑한 기분을, 혹은 그 비슷한 것이라도 되찾는 길이 과연 가능할까? 어쩌면 포기하는 건 비겁한 일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가장 인간다운 일이란 포기하기를 거부하고, 계속해서 찾고 파헤치는 일인지도 모른다. 결국 내가 그러고 싶었다. 환상을 유지하기 위해 거짓말을 지어내는 건 그만두었지만, 만일 내 믿음을 되찾을 수 있는 길이 있다면, 시도해볼 만할 가치는 있지 않았을까?

그런다고 내가 잃을 게 무엇이었을까? 전세계가 가라앉기 직전이었다.

태초에 우리 일곱 명이 있었다. 토마스, 제이콥, 바솔로뮤, 사이먼, 매튜, , 그리고 나. 신을 섬길 준비가 된 일곱 젊은이들. 토마스에게 벌어진 일은 알게 되었지만, 다른 이들은? 우리는 각자의 길을 가게 된 지 오래되었지만, 어쩌면... 어쩌면 그들의 길을 이해하게 된다면, 나의 길도 이해할 수 있게 될 지도 몰랐다.

적어도 해볼 만한 일이었다. 그 시작은 잠식해오는 바다로부터 벗어나는 것이었다. 교회로 돌아갈 수는 없었지만, 어디로든 가야 했다. 그래서 나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마치 모든 사람들이 애도라도 하는 것처럼 거리는 이제 기이하게 조용했다. 어쩌면 사람들은 포기한 걸지도 모른다. 아니면 폭풍 전의 고요일지도 모른다.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도시에서 가장 빈곤한 구역에 가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항구와 공업 지구 사이에 있는 무인 지대. 그곳은 지저분한 주점이나 비극적인 예술가들과 현명한 창부들로 가득한 매음굴로 이루어진 자유분방한 피난처가 아니었다. 그곳은 그저 저렴하고 조잡한 잿빛 집들이 열을 지어 이어져 있을 뿐이었다. 여기서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둘 이상의 직업을 갖고 있었고, 집에는 겨우 잠만 자러 왔다

이 곳에서 자라는 것에 대해 상상해보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마치 특색 없는 복도처럼 상상이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어쩌면 이곳은 지옥일지도 몰랐다. 고문을 위한 장소가 아니라, 꿈도 두려움도 의미가 없는 장소 말이다.

교회 근처에서 제이콥을 찾았다. 희망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흉측한 무허가 건물. 그는 본래의 나이보다 더 늙어 보였다. 손에는 굳은살이 박였고 회색 턱수염이 무성했다. 제이콥은 내가 온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는 모래주머니를 쌓느라 바빴고 나는 그게 침수를 막을 장벽을 쌓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온통 땀을 흘리며 제이콥은 홀로 그 일을 하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고 내게 처음 든 생각은... 어리둥절함이었다. 왜 무용한 일에 저렇게 정성을 쏟는 거지? 왜 이 비참하고 무가치한 거리를 보호하려 애쓰는 거지? 그는 우리가 충분히 오래 버티기만 한다면, 침몰은 멈출 것이고 결국엔 모든 일이 괜찮아질 거라고 믿는 부류의 사람이었나?

내가 기억하는 그는 쉽게 그럴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제이콥은 놀라울 만큼 고지식한 학생이었고, 어려운 질문에 답을 요구하고 모순된 것처럼 보이는 모든 가르침에 도전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누구보다 가장 성서를 잘 알았고, 지나치게 지적일 정도로 신학에 개인적으로 깊이 몰두하고는 했다. 그와 대화를 나누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그가 작고 사소해 보이는 부분에 집착할 때면 대화는 종종 불편할 정도로 격해지고는 했다.

지금 내가 말을 건네는 사람은 그와는 달랐다. 그는 내게 웃어 보이고는 도와달라고 말했고, 나는 그렇게 했다. 우리는 오랫동안 무거운 모래 주머니들을 쌓았다. 근육이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지만 어째선지 나는 제이콥이 그만두기 전까지는 멈추고 싶지 않았다. 그 운동은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했고, 나는 신체적 고통이 스스로를 정화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랐다. 마치 신이 제이콥을 보내서 내가 돌아갈 길을 찾을 수 있도록 돕게 하기라도 한 것 마냥.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침묵은 그 작업을 신성하거나 혹은 상징적인 일로 느끼는 데 일조했다. 요점은 모래 주머니를 쌓는 게 아니라 겸허하게 신을 섬기는 데 있었다. 나는 현기증을 느꼈고 아주 짧은 순간 일종의 깨달음에 거의 도달했다고 믿을 뻔했다.

하지만 난 그저 배가 고프고 지쳤으며 다시 이야기를 믿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을 뿐이었다.

작업이 끝나고 제이콥과 나는 교회 앞에 앉아 샌드위치를 먹었다. 그제서야 우리는 이야기를 나누었고, 제이콥은 확실히 변했지만 내게 나눠줄 신의 가르침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 그는 도시의 이 구역에서 일하면서 목격한 것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서로를 학대하는 남자와 여자들, 굶주리는 어린이들, 쉽게 치료할 수 있는 병에 걸렸지만 치료비를 감당할 수 없어 죽어가는 사람들... 끊임없이 이어지는 끔찍한 대학살의 나날.

그럼에도 그는 머물렀다. 그 동안 그는 그 사람들의 닻이었고, 피난처였으며, 친구이기도 했다. 그는 모두가 포기한 뒤에도 계속해서 모래 주머니를 쌓았다. 어떻게 그가 믿음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 그는 내게 거의 성자처럼 보였고, 나는 어떻게 해야 그가 가진 신앙심의 일부라도 되찾을 수 있을지 말해달라고 간청했다.

기도를 올렸을까? 그의 꿈에 신께서 나타나 말하셨을까? 성경 속에 내가 모르는 숨겨진 길이 있어, 이 불가능한 평온을 그가 이루게 해주었을까?

내 질문에 제이콥은 웃었다. 쓴웃음도 비웃음도 아니었지만, 꽤 큰 소리로 웃었다.

그러더니 그는 오래전에 신을 믿기를 그만두었다고 말했다. 이제 그는 철저한 유물론자라면서. 우리는 살고, 죽는다, 그게 전부라고. 영혼이란 존재하지 않고, 대륙의 침몰은 인류에 대한 종말론적 시험이 아니라 단지 설명할 수 없는 자연 현상일 뿐이라고.

그는 갑작스럽고 거의 우습게 믿음을 잃어버렸다고 말했다. 그가 매일 마주한 고통과는 관련이 없었다. 그가 요람에서 굶어 죽어가는 어린아이를 보았을 때조차 그는 의심을 품지 않았다. 오직 그런 일들이 일어나도록 내버려두는 현대의 가이사들에게 분노했을 뿐이었다. 그런 게 아니라, 그는 한 편의 다큐멘터리를 보다가 믿음을 잃어버렸다.

바누아투에 존 프럼이라는 사람을 섬기는 화물 신앙이 있다고 그는 말했다. 그들의 신앙에 따르면, 존 프럼은 미국 군인의 모습을 한 예언자였고, 사람들이 이 초자연적인 미군들의 규범을 제외한 다른 규범을 거부하고 계속해서 존 프럼을 따르면 언젠가 그가 돌아와 그 사람들이 바라는 모든 것, 그 중에서도 특히 미국산 상품들을 가져올 것이었다.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제이콥은 웃기 시작했다. 웃음을 자제할 수가 없었다. 너무나 명백하게 거짓이었고, 너무나 명백하게 오해에 기인했으며, 너무나 명백하게... 어리석었다. 어떻게 사람들이 그런 걸 믿을 수 있었을까? 그리고는, 그가 말했다, 단지 좀 더 오래전에 시작되었을 뿐이지 그가 완전히 똑같은 걸 믿는다는 걸 그 즉시 명확하게 깨달았다고.  죽음에서 되살아난 목수는 화물 비행기를 몰고 온 미군 만큼이나 어리석은 이야기라고.

그 순간 모든 것이 그에게서 떠나갔고, 웃음을 멈춘 뒤엔 전에 없이 개운한 기분이 들었다고 그는 말했다.

나는 충격을 받았고 혼란스러웠다. 그에게 믿음이 없다면, 왜 아직 여기에 있는 걸까? 어째서 그는 이 사람들을 섬기고, 이렇게나 이타적으로 많은 것을 희생하는 걸까? 어째서 모래 주머니를 쌓고 있지?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나는 신을 믿지 않아," 그가 말했다. "단지 그를 위해 일할 뿐이지."

 

내레이션  - Peter Wingfield

작가/감독 - Jonas Kyratzes

음악/음향 - Chris Christodoulou

커버 아트 - Daniele Giardini

Copyright 2021 Jonas Kyratzes & Chris Christodoulou

이 게시물은 비공식 팬 번역으로, 저작권은 올바른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대륙이 가라앉기 시작한 날, 나는 신에 대한 믿음을 잃었다.

 

그건 끔찍한 소식으로 인한 믿음의 위기 같은 것이 아니었다. 나는 하늘을 향해 주먹을 쳐들고 인간을 저버렸다며 신을 저주하지 않았다. 그저 부재만이 있었다. 무언가 제자리에 있지 않다는 갑작스러운 깨달음. 내 마음 속에서 믿음이 위치하던 자리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그게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그냥...그랬다.

당신이 답을 찾아서, 아니면 그저 위안을 얻기 위해 교회에 찾아 왔으리라고 확신한다. 당신은 내가 그 자리에 있기를 필요로 했다. 신께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그랬듯이 물에게 명해 침몰이 멈출 거라고 당신에게 말해 주기 위해서. 그리고 나는 당신에게 기도하라고 말해주어야 했다. 기도는 당신이 뭔가 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지고 느껴지니까. ...당신이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조차.

하지만 당신이 교회로 찾아왔을 때, 나는 그곳에 없었다. 위로의 말도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한 의식도 없었다. 그저 침묵 뿐이었다.

당신에게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지만, 그게 내 본심인지 잘 모르겠다.

할머니께선 죄악 중에서도 가장 큰 죄악은 위선이라고 하셨다. 그의 죄가 미덕이라고 믿는 죄인이 믿음이 없는 성자보다 낫다고. 그것이 비록 우연의 결과라 할지라도, 내가 바로 믿음이 없는 성자였다. 그런데... 나는 알고 있지 않았던가? 그동안 내내 알고 있지 않았던가?

당신은 근심과 의심을 가지고 내게 왔고, 나는 당신에게 답을 주었다. 단순한 내 의견이나 미사여구 이상의 답을. 그 답들은 저 위에 계신 분과 직접 소통할 수 있는 선이어야 했다. 내가 일생을 바친 바로 그 분 말이다.

나는...권위자였던 셈이다. 침몰은 멈출 것이고, 경제는 회복될 것이며, 우리의 적은 패배할 거라고... 패배해야 마땅하다고 확언하는 이들처럼. 믿음의 문제였다.

과연 그 사람들이 자기 말을 믿었을까? 거짓을 받아들이고 거울에 비친 자신들을 마주하기 위해, 그들의 말이 사실이라고 그들 스스로에게 말할 필요가 있었을까? 아니면 그저 그게 그 사람들의 직업일 뿐이고, 그들의 말에는 아무 의미도 없었을까? 내 생각엔... 내 생각엔 당신에게 거짓말을 한 것처럼 나는 내게도 거짓말을 한 것 같다. 의심이 기어들어올 때면, 나는 내게 그저 내가 지쳤고, 침울하거나 압도된 것 뿐이라고 말하고는 했다.

진실은 내 믿음이 일상이 되었다는 것이다. 치유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고통을 가라앉히기 위해 반복되는 진부한 문구들로 이루어진 일상. 내겐 답이 없었다. 하지만 써먹기 좋은 격언들은 항상 있었다. 그리고 어떤 격언도 들어맞지 않을 때면...  신께서는 미지의 방식으로 행하신다.

믿음이란 자명한 것 아닌가? 곧바로 깨달을 수 있는 것이 바로 믿음 아닌가? 당신이 의심에 고통 받아, 말과 이미지들로 당신을 속여 스스로를 설득해야 한다면... 그건 믿음이 아니지 않은가? 그건 절박함이다.

몇 년 전에 본 뉴스가 기억난다. 중동의 어딘가에서 결혼식이 열렸고, 드론 한 대가 결혼식장에 미사일을 쐈다. 난 가족과, 사랑하던 이를 잃은 신부의 표정을 보았고... 주저없이 그 자리에서 신께 기도했다

신부가 평화를 찾기를 기도했고, 미사일 발사 버튼을 누른 그 영혼을 위해서도 기도했다.

하지만 지금, 나는 파도가 얼마나 빨리 육지를 침범하는지 계속해서 이어지는 뉴스 화면들을 보고 있고... 그 주저없음은 사라지고 없다. 분노도, 실망도 없다. 그저 아무것도 없다.

이 모든 것들... 책과, 상징들과, 내 믿음의 모든 물리적 함정들은... 그저 물체일 뿐이었다. 교회는 신성한 곳이 아니었다. 그저 건물일 뿐이었다. 심지어 건물조차 아니었고, 집조차도 아니었다. 그저 쌓아 올린 벽돌들일 뿐이었다. 만일 진실이 존재한다면, 내가 어딘가에 속해있다면... 그게 이곳은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일어나 걷기 시작했다.

교회를 나서서, 내리막길을 지나, 탱크와 경찰차들을 지나, 걸인들과 시위하는 사람들을 지나, 그저 바다에 이를 때까지 계속 걸어갔다

항구가 가라앉는 걸 보기 위해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파도는 거대했고, 두려웠으며, 불가해할 만큼 강력했다. 항구의 동쪽 절벽은 곧 무너질 것처럼 보였고, 건물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대피했지만... 누군가 등대 꼭대기에 서 있었다.

내가 도착했을 때 구경꾼 한 명이 나를 알아보았고, 경찰이 내게 말을 걸었다. 경찰은 등대에 남은 사람이 내 지인인 동료 성직자 토마스라고 했다. 모든 것이 바다에 삼켜지기 전에, 그가 내려오도록 내가 설득해야 하나?

나는 그러기로 했다. 믿음을 잃어버린 것이 내 도덕률을 바꾸지는 않았다. 그걸 적절히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은 앗아갔지만.

경찰이 내게 확성기를 주었지만 토마스에게 외치는 건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등대로 올라갔다

계속 들이치는 파도의 포말을 피하려 얼굴을 가리고 텅 빈 길을 걸어 올라가면서 나는 토마스를 생각했다.

토마스의 신앙은 내 신앙과는 달랐고, 나는 그의 신앙을 존경하면서도 불편하게 여겼다. 그는 신의 존재가 당연하게 여겨지는 매우 종교적인 환경에서 자랐다. 그 이상으로 그에게 신앙은 일상의 일부였고, 공개적으로 논해지고 기념되는 것이었다. 그런 환경은 토마스를 거의 경박할 정도로 낙천적인 성격으로 만들었고, 그의 확신은 타고난 것이었다. 때로 나는 토마스에게 세계가 얼마나 단순하고 명확하게 여겨지며, 그 덕에 토마스가 얼마나 쉽게 친절을 베풀고 이타심을 보이는지 질투했다.

하지만 그렇게 신앙을 타고 났다면, 정말로 신을 찾은 적은 없는 것이 아닌지 때로 나는 생각하곤 했다. 스스로 답을 찾을 필요도 없이 그저 답이 주어졌다면, 그것이... 여전히 믿음인가? 그건 그저... 문화인 것은 아닐까?

등대에 도착했다. 나는 멍했지만, 파도가 부딪히는 소리에 둔탁하게 이어지는 원초적인 두려움을 느꼈다. 내 육신은 몇 백 만 년에 걸친 진화의 결과였고, 이에 본능적으로 바다는 삶과 죽음의 현신임을 알고 있었다.

토마스는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멍하니 나를 바라보았고 그 즉시 나는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음을 깨달았다. 그러더니 그가 비행기 사고에 대해 기억하느냐고 물었기에 나는 놀랐다.

몇 년 전의 일이었다. 비행기 한 대가 벼락을 맞고 산산조각나 바다로 흩어졌다. 312명의 사람들이 죽었다. 하지만 뉴스에서는 재난을 피해간, 부모와 두 아이로 구성된 가족의 이야기를 보도했다. 그 가족은 공항에서 몸이 안 좋아졌음을 느꼈고 비행을 연기했다.

토마스가 말하길, 사람들이 그를 찾아와 말했다고 했다. 그건 기적이라고. 신께서 개입하셨다. 신께서는 그들이 살기를 바라셨다. 토마스는 자문했다. 그렇다면 왜 신께서 다른 사람들은 살기를 원하지 않으셨는가? 하지만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렇다고, 신께서는 미지의 방식으로 행하신다고 말했다. 결국엔, 그게 아주... 구체적으로 느껴졌다. 의도적이었다고. 마치 때 맞춰 신의 손이 닿아 그들을 멈춘 것처럼.

그리고는, 일주일 뒤에 그 가족은 교통사고로 전부 죽었다

그 사고의 순간을 생각하는 걸 멈출 수 없었다고 토마스는 말했다. 육신이 터져나가도록 짓누르는 금속을. 아이들의 뼈가 부러지는 것을. 그들은 얼마나 괴로워 했을까? 차가 멈추고 피를 흘리며 누워있는 동안, "신께서 우리를 구하셨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지?" 라고 생각했을까? 아니면 그 모든 게 순식간에 진행되어서, 폭발하는 고통과 두려움을 어둠이 삼켜버렸을까?

그 때는 아무도 그에게 찾아와 기적을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신이 그들을 지켜주었다고 믿는 것이 그렇게 쉬웠다면, 이번에는? 이 두 번째 사건은 훨씬 더 급작스럽고 더 구체적이었다. 의도는 명확했다. 신께서는 그들이 죽기를 바랐다.

단지 첫 번째 시도를 놓쳤을 뿐이다.

토마스가 난간에 올라서며 말했다. 어째서 우리는 신이 사람들을 구한다고 계속해서 말하는 걸까? 죽음은 모든 생명에게 찾아오는데도. 이 세계는 생명 다음에 생명이 이어지도록 설계되어 있고, 우리의 수는 무수히 많으며, 단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우리 모두가 죽게 된다는 것인데도.

그가 말했다. 어쩌면, 신은 그저 죽이는 걸 즐기는 것일지도 몰라.

 

내레이션  - Peter Wingfield

작가/감독 - Jonas Kyratzes

음악/음향 - Chris Christodoulou

커버 아트 - Daniele Giardini

Copyright 2021 Jonas Kyratzes & Chris Christodoulou

이 게시물은 비공식 팬 번역으로, 저작권은 올바른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우리는 11번가의 모퉁이에서 헤어졌다.

건너편 인도에서 나는 고개를 돌려보았다. 당신은 이미 돌아서면서 내게 손으로 작별인사를 하고 있었다.

자동차들과 사람들의 행렬이 우리들 사이를 지나가고 있었다. 어느 오후 다섯이였다. 그 강이 슬픈 아케론데, 결코 건널 수 없는 강이 되리라는 것을 내가 어찌 알았으랴.

우리는 더 이상 보지 못했다. 일 년 후 당신이 죽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고, 그것을 보고, 그리고 그것은 거짓 기억이고 그 사소한 작별 뒤에는 영원한 이별이 잇었다는 것을 생각해 본다.

어젯밤 나는 식사 후 산보를 나가지 않았다. 나는 그런 유의 비밀을 풀어보려고 플라톤이 자신의 선생 입을 빌려 했던 마지막 가르침을 다시 읽어보았다. 그것에는 육신이 죽으면 영혼은 떠난다고 씌어 있었다. 지금 나는 사후에 떠오르는 통괄적 해석과 멋모른 이별 중 어느 것이 진실이 들어 있는지 판단을 내릴 수가 없다.

영혼들은 죽지 않기 때문에 영혼들 사이의 이별은 사소한 것에 불과하게 된다면 얼마나 좋은 일인가.

작별인사를 나누는 것은 이별을 부정하는 일이다. 말하자면 <오늘 우리는 작별의 놀이를 하지만 우리는 내일 다시 만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비록 자신들이 우연적이고 덧없는 존재이기는 하지만 어떤 방식이 됐든 불멸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작별인사라는 것을 고안해 냈던 것이다.

델리아, 언젠가 우리는 다시 서로 이어지게 되리라. 어느 강가에서? 이 불확정적인 말. 우리는 한때 우리가 평원 속에 묻혀 있는 한 도시 속에서 정말로 보르헤스와 델리아였는지 자문해 보게 되리라.

 

Jorge Luis Borges

역자 황병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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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우리는 절대적 환대에 기초한 사회를 상상할 수 있다. 아니 사회란 본디 절대적 환대를 통해 성립한다고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절대적 환대가 불가능하다면, 사회 역시 불가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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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영혼과 육체의 대립 속에서 간과되어온 그림자의 문제, 다시 말해 '사람'의 문제를 다룬다. 우리는 어떻게 이 세상에 들어오고, 사람이 되는가? 우리가 사람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 받아들여진 것인가 아니면 이 세상에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사람이 된 것인가? 다시 말해서 '사람'이라는 것은 지위인가 아니면 조건인가? ('자격'이라는 단어는 지위를 가리키기도 하고 조건을 가리키기도 한다.) 조건부의 환대 역시 환대라고 할 수 있을까? 우리에게 주어진 환대가 언제라도 철회될 수 있다면, 우리는 진정한 의미에서 환대되지 않은 게 아닐까? 이것이 이 책이 제기하는 질문들이다. - pp,25-26

이 책은 또한 환대의 개념이 내포하는 어떤 역설을 해결하려고 노력한다. 칸트에게 있어서 환대의 권리는 우리가 (특정한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가 아니라) 사람으로서 갖는 권리이다. 하지만 우리가 환대를 통해 비로소 사람이 된다면, 우리를 사람으로 대우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환대를 요구하는 일이 어떻게 가능한가? (중략) 즉 절대적 환대 없이는 사회가 생겨날 수 없음을 보임으로써 - 절대적 환대의 필요성을 증명하려 하였다. - p.27

사람이라는 것은 어떤 보이지 않는 공동체 - 도덕적 공동체 - 안에서 성원권을 갖는다는 뜻이다. 즉 사람임은 일종의 자격이며, 타인의 인정을 필요로 한다. 이것이 사람과 인간의 다른 점이다. 이 두 단어는 종종 혼용되지만, 그 외연과 내포가 결코 같지 않다. 인간이라는 것은 자연적 사실의 문제이지, 사회적 인정의 문제가 아니다. 어떤 개체가 인간이라면, 그 개체는 우리와의 관계 바깥에서도 인간일 것이다. 즉 우리가 그것을 보기 전에도, 이름을 부르기 전에도 그 고유한 특성에 의해 이미 인간일 것이다. 반면에 어떤 개체가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사회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사회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어야 하며, 그에게 자리를 만들어주어야 한다. - p.31

노예에게 얼굴이 없다는 것은 그에게 지켜야 할 체면face 또는 명예honor가 없다는 것, 타인을 대함에 있어서 얼굴 유지face-work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또한 상대편에서 노예의 얼굴을 고려할 필요가 없음을 뜻한다. 노예는 고프먼이 분석한 '상호작용 의례' - 그 핵심은 상대방이 사람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 에서 제외된다. 다른 말로 하자면, 노예는 사회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는 타인 앞에 현상할 수 없고, 타인은 그의 앞에 현상하지 않는다. - p.36

패터슨은 "노예는 사람이 아니라 물건"이라는 로마법의 규정을 권력power의 관점에서 재해석한다. 로마법에서 사람, 물건, 지배dominium는 서로 연결된 개념으로, 노예제의 확대와 절대적 소유권의 확립이라는, 거의 동시적으로 나타난 두 역사적 현상 속에서 그 의미가 확정되었다. 로마인들에게 '물건'은 무엇보다 노예를 가리켰으며, '지배'는 일차적으로 주인과 노예의 관계를 지시하였다. 절대적 소유권, 즉 배타적인 지배란 주인이 노예에게 어떤 짓을 해도 제삼자의 간섭을 받지 않는다는 것, 혹은 사회적으로 그 행위가 승인된다는 것, 다시 말해 노예의 완전한 고립과 무력함powerlessness을 함축한다. 패터슨이 올바르게 지적했듯이, 소유권이란 사람과 물건의 관계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의 관계이다(사람과 물건이 '관계'를 맺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정확히 말해서 소유권은 일종의 권력관계이며, 노예가 물건이라는 법적 허구는 이 관계 안에서 노예가 처하는 절대적으로 무력한 위치를 표현한다. - pp.38-39

전쟁이라는 게임 속에서, 적대하는 두 국가는 각각 인구의 일정 부분을 차출하여 그들로부터 사람의 지위를 빼앗고, 총알이나 포탄과 같은 소모품으로 만들어버린다. 군인은 적에 의해서도 죽지만, 자기 편에 의해서도 죽는다(명령을 위반할 경우). 사실 군인이 적에 의해 죽는 것은 이미 자기 편에 의해서 언제든지 죽을 수 있는 존재로, 아니 어떤 의미에서 죽어 있는 존재로 강등되었기 때문이다.

고프먼은 『수용소』에서 재소자의 인격에 가해지는 체계적인 모독의 테크닉을 자세히 기술한 바 있다. (중략) 개인의 존엄을 침해하며 그의 자아 이미지를, 나아가 자아 자체를 왜곡시키는 이러한 테크닉들은 모든 종류의 '총체적 시설total institution'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데, 군대도 물론 그 가운데 하나이다. 군대에서 이런 과정은 훈련이라는 이름으로 합리성을 부여받고 있지만, 그 진정한 목적은 군인들의 인격을 부정하여 그들을 사물로, 사회적으로 죽은 사람으로 만드는 데 있다. 모독mortification의 어원에 죽음mort이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런데 군인들이 이렇게 인격을 박탈당하고 물건처럼 사용되는 동안에도 국가들 - '주권자들' 사이에서는 인격적 관계가 유지된다(만일 그렇지 않다면 강화가 불가능할 것이다). 국가들은 서로 전쟁을 벌이기도 하지만, 동맹을 맺고, 우의를 다짐하고, 돈을 꿔주거나 갚고, 축구 시합을 하기도 하는 인격체들이다. "전쟁은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라는 클라우제비츠의 명언은 이 사실을 가리킨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군인과 민간인을 구별하는 논리는 전쟁놀이를 할 때 각작 제일 아끼는 장난감은 건드리지 말기로 하자는 아이들의 약속과 비슷한 것이다. - pp.42-44

역설적이지만, 사형의 이 같은 비가시화와 '인간화'는 사형수가 벌거벗은 생명이 되었다는 징후로 해석할 수 있다. 『감시와 처벌』 첫머리에서 미셸 푸코는 국왕 시해 음모자 다미앵의 처형 장면을 상세하게 묘사하면서, 사형수의 고통받는 신체를 통해 스스로를 과시하는 권력에 대해 이야기한다. 하지만 범죄자의 신체를 극단적으로 사물화함으로써 그의 인격을 모독하려는 권력의 광기는 본의 아니게, 그 범죄자가 여전히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다미앵의 사지를 찢으면서 권력은 그의 인격이 뿜어내는 힘 - 베버가 카리스마라고 부른 것 - 에 대한 두려움을 표현한다. 범죄 행위가 대담할수록 범죄자의 카리스마도 커지며, 그의 인격을 박탈하는 의례 또한 그만큼 화려해져야 하는 것이다. 현대의 사형제도는 이와 대조적으로, 범죄자를 격리된 장소로 끌고 가서 소수의 입회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조용히 안락사시키는 방법을 택한다. 범죄가가 이미 사회 바깥에 있다는 생각은 그를 좀더 '인간적으로' 대우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그는 사람이 아니라 단순한 생명에 불과하기에, 그의 고통은 어떤 상징적인 가치도 갖지 않으며, 그에 대한 마지막 배려 역시 '동물 복지'를 논할 때와 유사하게, 불필요한 고통을 줄이는 문제에 집중된다. - pp.53-54

그러므로 사회를 유기체나 시계, 또는 벌떼가 와글거리는 벌집에 비유하는 것은 잘못이다. 사회는 그와 같이 물리적으로 분명한 윤곽을 갖는 객관적 실체가 아니라, 각자의 앞에 상호주관적으로 존재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면, 사회는 각자의 앞에 펼쳐져 있는 잠재적인 상호작용의 지평이다. 우리는 이 지평 안에서 타인들과 조우하며, 서로의 존재를 인정한다는 신호를 주고받는다. 타인이 내게 '현상한다'는 말은 그가 나의 '상호작용의 지평 안에 있다'는 말과 같다. 따라서 타인의 존재를 알아보고, 그가 나의 알아봄을 알아볼 수 있도록 내 쪽에서 존재의 신호를 보내는 것은 그의 사회적 성원권을 인정하는 의미를 띤다. 동시에 나는 이러한 행위를 통해 나 역시 그에게 현상하고 있다는 믿음 - 우리가 함께 사회 안에 있다는 믿음 - 을 표현하며, 상대방이 나의 믿음을 확인해주기를 기대한다. 물론 상대방은 나를 '무시'할 수 있다. 즉 나의 신호에 화답하지 않고, 마치 내가 '보이지 않는다'는 듯이 행동할 수 있다. 상호작용의 의례는 언제나 위반과 중단의 가능성을 내표하며, 그 때문에 문화적 코드의 단순한 실행 - '국지적 활성화' - 으로 간주될 수 없다. 의례의 사슬을 구성하는 행위들 하나하나는 질문이자 요구이며, 초대이자 도전이다. 말하자면 그것들은 '인정투쟁'의 계기들을 구성하는 것이다. 사회의 경계는 이 나날의 인정투쟁 속에서 끊임없이 다시 그어진다. - pp.58-59

세계화는 점점 더 선진국의 부유한 시민들과 그들을 위해 허드렛일을 하러 온 이주노동자들의 관계를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백인들과 원주민의 관계와 비슷하게 만들고 있다. 이주노동자들이 말썽을 부릴 때 언제든지 송환할 수 있다고 여겨지는 '본국'은 '다른 나라'가 아니다. 선진국에 수출할 커피나 설탕을 생산하느라 식량을 재배할 땅이 모자라고, 선진국의 손님들이 이용할 별장, 호텔, 스파, 골프장, 카지노를 짓느라 집과 학교를 지을 공간이 부족한 그 나라는, 반투스탄이 남아공의 일부인 것처럼, 사실상 선진국의 일부이다. 남아공의 백인들은 흑인들의 노동력을 이용하면서도 그들에게 성원권을 주지 않기 위해 반투스탄이라는 외국을 발명하였다. 경제적으로 이미 연결되어 있고 상호의존적인 세계에서, 외국이나 외국인이라는 범주가 사용되는 방식도 이와 비슷하다. 국제분업은 이 세계의 거주민들을 '유기적인 연대' 속으로 밀어넣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외국인이라는 범주에 집착하면서, 자기들이 하나의 사회 속에 있음을 부인한다. 그들은 외국인은 다른 나라에서 왔고 자기 나라가 있으므로, 내 나라 사람과 다르게 대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한다. 외국인으로서의 환대와 사회적 성원권의 부여는 구별되어야 한다고 말이다. 어쩌다가 잠깐 외국인이 된 사람이라면 이 말에 동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외국인으로 계속 살아가야 하는 사람, 외국인이라는 운명 속으로 추방된 사람에게 그 말은 다르게 들릴 것이다. 외국인으로서의 삶 외에 다른 삶을 택할 수 없는 사람에게 그것은 그가 결코 온전한 사람이 될 수 없다는 말과 같다. - pp. 71-72

여성이라는 범주에 언제나 붙어 다니는 더러움과 오염의 관념 - 그에 따라 여성은 더러운 여성과 깨끗한 여성으로 나누어진다 - 을 우리는 이런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 여성은 신발이나 밥그릇과 같은 방식으로 더러워지지 않는다. 즉 그 자체로는 더럽지 않지만 제자리에서 벗어나면 더럽다고 여겨지는 게 아니다. 가부장제도 하에서 여성은 사회 안에 어떤 적법한 자리도 가지고 있지 않다. 여성은 단지 스스로를 비가시화한다는 조건으로, 물리적인 의미에서 사회 안에 머무르는 것을 허락받고 있을 뿐이다. 여성이 자신의 존재를 주장하면서 동등한 사람으로서 사회 안에 현상하려는 순간, 이 허락은 철회된다. 여성이 보이기 시작하자마자 사회는 여성이 잘못된 장소에 있다는 것, 정확히 말하면 잘못 인쇄된 글자처럼, 여성의 존재 자체가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다시 말하면 여성은 장소를 더럽히는 존재로서만 사회 안에 현상할 수 있다. '깨끗한' 여성이란 보이지 않는 여성이다.[각주:1] - p.78

한편 다른 관점에서 본다면, 오염의 메타포는 그것이 겨냥하는 대상이 지배계급의 통제에서 벗어나 있음을 함의한다. '더럽다'는 말은 죽일 수도 길들일 수도 없는 타자에 대한 미움과 두려움을 담고 있다. 그 말은 상대방의 존재를 부정하는 동시에, 그러한 부정이 굳이 필요했음을 인정함으로써 그의 주체성을 역설적으로 인정한다. 그래서 어떤 페미니스트들은 '더러운 년'이라는 욕을 들어도 전혀 위축되지 않으며, 오히려 이런 말을 듣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는 것이다. - p.80

(전략) 사람이 수행적이라는 것은 사람다움personality이 우리 안에 있지 않다는 뜻이다. 사람다움은 우리가 원래 가지고 태어났거나(그래서 잃지 않으려고 애써야 하거나) 사회화를 통해 획득해야 하는 본질이 아니다. 그보다 사람다움은 우리에게 있다고 여겨지며, 우리 스스로 가지고 있는 체하는 어떤 것, 서로가 서로의 연극을 믿어줌으로써 비로소 존재하게 되는 어떤 것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본질을 갖지 않는 현상이다. - pp.83-84

(전략) 이를 통해 우리는 인격personality이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상호작용 속에서 끊임없이 현상하는 것임을 이해하게 된다. 고프먼의 표현을 빌리면, "얼굴은 그것을 갖고 있는 사람의 내부나 표면이 아니라, 만남을 구성하는 사건들의 흐름 속에 퍼져 있다."[각주:2] 우리는 얼굴face을 갖고 있다는 사실에 의해 사람이 된다. 하지만 이 얼굴은 우리 몸의 일부도 아니고, 영혼의 반영도 아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의 만남 속에서 얼굴이 있는 듯이 행동하고, 우리의 얼굴에 대해 존중을 요구함으로써 얼굴이 실제로 거기 있게 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상대방의 사람 연기에 호응하고, 그의 얼굴에 대해 경의를 표시하며, 그가 얼굴을 유지할 수 있게 도와야 한다.[각주:3] 말하자면 얼굴은 상호작용 속에서 가정되고 또 실현되는, 의례적 픽션이다. 우리는 서로의 얼굴에 대해 의례를 행함으로써 서로를 사람으로 임명한다. - p.87

여기서 얼굴과 가면이 다르다는 점을 지적해두기로 하자. 인격과 성격을 구별하듯이 우리는 이 둘을 구별해야 한다. 가면이 우리가 연기하고자 하는 성격과 관련된다면, 얼굴은 그 가면의 배후에 있다고 여겨지는, 연기자로서의 우리의 주체성과 관련된다. 나는 지금 가면의 뒤에 연기되지 않은 진짜 자기가 있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우리는 언제나 자기를 연기하며, 심지어 일기를 쓸 때도 그러기 때문에, 진정한 우리 자신이 어떠한지 결코 알 수 없다. 가면의 뒤에 - 즉 얼굴의 자리에 - 있는 것은 어떤 종류의 내면성이 아니라, 신성한 것the sacred 또는 명예이다. - pp.88-89

모욕은 존엄을 공격할 뿐 아니라, 실제로 그것을 무너뜨린다. 배타적 민족주의운동이나 파시즘은 먼저 배제하고자 하는 집단을 공공연히 모욕하는 데서 출발한다. 모욕당하는 집단이 여기에 효과적으로 저항하지 못하면, 그리하여 다른 사회 구성원들의 침묵과 방관 속에서 이런 모욕이 일상화되면, 그때부터는 법적으로 이 집단의 권리를 축소시키는 일이 가능해진다. - pp.103-104

현대 사회는 낙인의 존재를 부인하는 경향이 있다. 낙인은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믿음과 양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존엄의 관념은 낙인을 초래하는 불명예스러운 속성들을 포함하여, 사람들을 높이거나 낮추는 차이들이 모두 사소하고 우연적이며 비본질적인 것이라는 주장을 내포한다. 이에 따라 낙인자the stigmantized와 정상인the normal의 만남은 어떤 종류의 기만을 수반하곤 한다. 정상인은 낙인을 포용하는 듯한 몸짓을 한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마음속으로는 낙인자가 자신과 동등한 인간임을 믿지 않는다. (중략) '사회'를 대표하여 '소외된 이들'을 찾아가는 이 정상인들은 자기 앞에 있는 낙인자들을 아무나 덥석 껴안음으로써 자기가 그들에 대해 아무런 편견도 가지고 있지 않음을 과시하려 한다. 하지만 정상인들이 이렇게 낙인자들의 몸을 함부로 만질 수 있는 대상으로 취급한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관계의 불평등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 pp.122-123

우리는 순수한 폭력, 아무런 상징성도 띠지 않는 날것 그대로의 폭력과 의례로서의 폭력을 구별해야 한다. 체벌은 폭력인 동시에 일종의 의례이다. 체벌이 체벌당하는 사람의 협조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이 이 점을 잘 말해준다. 다른 모든 의례와 마찬가지로, 체벌은 맞는 사람과 구경하는 사람을 포함한 행위자 모두가 행위의 의미와 절차에 대한 지식을 공유하고, 그것이 이루어져야 하는 방식대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무언의 협력을 할 때만 성공적으로 수행될 수 있다. 종아리를 걷거나, 엉덩이를 내밀고 엎드리거나, 손바닥을 펴서 적당한 높이로 올리는 일, 매가 지나간 뒤에 다시 때릴 수 있도록 맞은 부위를 제자리에 갖다 대는 일, 복종의 표시로 눈을 내리까는 일 등이 그러한 협력의 예이다. (중략) 체벌이 하나의 의례로 구성되기 위해서는 체벌당하는 사람에게서 이러한 동의의 표현을 끌어내는 것이 필수적이다. 폭력의 의례를 순수한 폭력과 구별시켜주는 것은 바로 동의의 존재이기 때문이다(이 동의가 반드시 마음에서 우러나온 동의일 필요는 없다. ㄷ중요한 것은 겉으로 드러난 동의, 의례적인 수준에서 확인된 동의이다. - pp.129-130

우리는 이렇게 해서 모욕의 역설을 이해하게 된다. 모욕은 타인의 인격을 부정할 뿐 아니라, 그러한 부정에 대해서 부정당하는 사람의 동의를 강요한다. (중략) 하지만 모욕당하는 자가 모욕에 동의하는 순간, 모욕은 더 이상 모욕이 아니다. 그것은 의례의 일부이며, 질서의 일부이다. 결국 모욕은 자신의 본질을 부정하는 것을 최종적인 목표로 삼는 폭력이다. - p.131

(전략) 하지만 존비법을 이렇게 이해할 때 우리는 존비법의 목적이 존경의 표현을 의무화하는 데 있고, 존경이란 멸시와 마찬가지로 일종의 감정이라는 점을 잊기 쉽다. 존비법이 엄격한 사회는 일상적으로 엄청난 감정노동이 이루어지는 사회이고, 미처 처리하지 못한 감정의 찌꺼기들이 뒷골목에 흘러넘치는 사회이다(후략). - pp.135-136

한편, 사회를 상상적 공동체로 볼 때 사회이론의 핵심에 떠오르는 것은 성원권의 문제이다. 사회가 상상적 공도ㅇ체라면 그 경계는 불확정적일 수밖에 없다. 사회는 일차적으로 사람들의 머릿속에 들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그 사회에서의 성원권 역시 불확정적이다. 사회적 성원권은 이 점에서 시민권과 분명히 구별된다. 주어지거나 주어지지 않거나 둘 중 하나인 시민권과 달리, 사회적 성원권은 의례를 통하여 끊임없이 확인되어야 한다. 사람들은 상호작용 의례나 집단적 의례에 참여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의 성원권을 확인하고 자신의 성원권을 확인받는다. 사회란 결국 이러한 의례의 교환 또는 의례의 집단적 수행이 가능하다고 여겨지는 상상적 지평이다. - p.144

굴욕에 대한 고찰은 그러므로 구조와 상호작용 질서의 관계에 대한 질문을 제기한다. 현대 사회에서 이 둘은 분리되어 있는데, 우리의 논의 맥락에서 이것은 구조의 일부인 '경제'와 (순수한 의미에서의) '사회'의 분리로 나타난다. 이러한 분리에 의해, 우리는 (총체로서의) 사회 속에서 이중적 지위를 갖게 된다. 한편으로 우리는 노동자나 자본가로서 혹은 소비자나 생산자로서 시장에서 만난다. 우리의 관계는 계약적이다. 계약의 이름으로 우리의 불평등은 정당화된다. 다른 한편 우리는 사람으로서 연결되어 있다. 사람으로서 우리는 서로 평등하다. 계약관계의 기초에는 사람으로서의 평등이 있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은 형식적으로 평등하지만 실질적으로 불평등하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물어야 한다. 경제질서 속에서의 우리의 위치가 과연 사회관계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 p.162

(전략) 다른 말로 하면, 제도가 사람을 모욕할 때 그것은 모욕으로 인정되지 않는다. 하지만 신분주의든 아니든, 이런 관행이 노동자들에게 미치는 효과는 동일하다. 그들은 자기들이 사람대접을 받지 못한다고 느낀다. - p.165

현대 사회의 구성적 모순은 우정의 조건에 대해 생각해볼 때 가장 확연하게 드러난다. 우정은 선택을 전제하지만, 그 선택의 기준이 지위나 부 같은 물질적 조건이어서는 안 된다. 우정에 대한 많은 격언들은 벗을 선택할 때 오직 그의 영혼만을 고려하라고 조언한다. 하지만 우정이 주고받음을 통하여 만들어지는 이상, 물질적인 문제를 무시하는 것은 일종의 기만을 초래한다. 먼저 우정이 선택적인 관계임을 분명히 하기로 하자. 이 점에서 우정은 환대와 다르다. 환대는 시민적 의무이지만, 우정은 의무가 아니다. 환대를 거부하는 것(환대를 표현하지 않는 것 또는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모욕으로 해석되지만, 우정을 거절하는 것은 모욕이 아니다. 환대는 우정의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이다. 현대 사회는 보편적인 환대에 기초해 있다. 이 말은 모든 사람이 잠재적으로 친구임을 뜻한다. 하지만 환대가 우정으로 나아가는 데는 차별화의 원리가 작용한다. 우정은 차별성의 인정("너는 다른 사람들과 달라")이다. 우정이란 무수히 많은 사람 가운데 어느 한 명을 선택하는 것이고, 그를 특별하게 대우하는 것이다. 우정의 관점에서 보면, 누구에게나 줄 수 있는 것을 준다는 것은 아무것도 주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상대방에 대한 앎(또는 알아나감)에 기초한다는 점에서 우정은 기독교적 사랑과 구별된다. 기독교적 사랑은 무차별적이며, 개인들의 차이를 괄호 안에 넣는다. 그래서 아렌트는 기독교적 사랑의 진정성을 의심하였다. "기독교인은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각각의 사람이 오직 기회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적, 그리고 심지어 죄인조차도 사랑을 발휘할 수 잇는 기회에 불과하다. 이와 같은 이웃에 대한 사랑에서 실제로 사랑받는 사람은 이웃이 아니다 - 그것은 사랑 그 자체이다."[각주:4] 아렌트의 신랄한 지적에 따르면, 기독교적 사랑은 타자에게 모든 것을 내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타자에게 무관심하며 어떤 의미에서 타자를 이용한다. 타자에 대한 그 같은 헌신 밑에 있는 것은 증여를 통해 자아의 결핍을 메우려는 욕망이다.[각주:5] - pp.174-175

하지만 순수한 관계를 지향할수록 우정은 쉽게 좌초한다. 우정은 연애처럼 안전한 정박지를 향해 나아가지 않는다. 우정은 맹세의 말이나 서약의 장표, 의례와 기념일, 증인과 보증인, 시작과 끝을 공식화하는 서류들을 알지 못하며, 처음부터 끝까지 두 사람만의 관계로 머문다(반면 결혼은 하나의 계약으로, 모든 계약이 그렇듯이 그 효력을 보증하는 제삼자를 포함한다). 우정을 지탱하는 것은 당사자들의 기억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우정을 순수한 시간으로 환원할 수 있다. 이는 우정이 그만큼 많은 결별의 계기들을 품고 있다는 말도 된다. - p.177

얼굴을 유지하는 데는 돈이 든다. 사회라는 연극 무대에서 성공적으로 배역을 수행하려면, 적절한 의상과 소품을 갖추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자아 이미지는 그리고 자기에 대한 감각은, 우리를 다른 사람들과 구별해주면서 동시에 동등하게 만들어주는 이런 소유물들에 크게 의지하고 있다. 그래서 수도원에서 군대에 이르기까지 모든 총체적 시설은 먼저 입소자들에게서 이런 물건들을 빼앗는 것이다. 얼굴을 유지하려면 또한 사교라고 불리는, 명예가 걸린 게임에 참여할 수 잇어야 한다. 선물은 이 게임에 사용되는 화살이자 방패이다. 경제력을 상실한 사람은 이런 무기들을 살 수 없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게임에서 탈락하게 된다. 경제적인 소외가 이리하여 사회적인 소외로 이어진다. - pp.180-181

한마디로 가부장제는 이념형으로서의 현대 사회와 원리적으로 대립한다. 현대 사회는 모든 구성원이 사람으로 나타나는 사회이며, 지위나 역할, 또는 이해관계를 떠나 사람으로서 서로를 대할 수 있는 사회이다. 다른 말로 하면, 현대 사회에서는 모두가 모두에 대해 우정의 가능성을 열어둔다. 가부장제는 이 이념형의 대립물을 구성하는데, 우선 집주인=남자만 온전한 사람의 지위를 누리고 나머지 구성원은 그의 소유물과 비슷한 처지라는 점에서, 그리고 사람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물건에 대한 관심이 가족 관계를 지배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가부장제에서 여자와 아이들에게 주어지는 성원권의 불완전함은 우정의 제약으로 이어진다. 우정은 남성적인 미덕이며, 주로 남성 주체의 인격적 성숙이라는 테마와 결부된다. - pp.185-186

하지만 한국 사회가 (뒤르켐이 가부장제의 종말과 연관시켰던) 고도의 산업화와 학력화, 그리고 신분 질서의 해체를 겪는 동안, 가족은 위의 그림과 사뭇 다른 모습으로 진화하였다. 뒤르켐의 예견과 달리, 능력주의 사회의 도래는 상속제도의 소멸을 가져오지 않았다. 상속의 방식 혹은 전략을 바꾸어놓았을 뿐이다. 부모들은 재산을 직접 물려주는 대신에, 자녀의 몸에 그것을 투자하고 그 몸을 물려주기로 마음먹는다. 그리하여 아이들은 상속자이면서 동시에 투자 대상, 즉 재산 자체가 된다. 외관상 많은 점에서 가부장제와 거리가 있어 보이는 이 새로운 가족 안에서, 재산의 관리 - 즉 아이들의 몸과 시간표의 관리 - 는 여전히 구성원들의 관심을 지배한다. 상속이 특정한 시점이 아니라 양육 기간 전체에 걸쳐 이루어지기 때문에, 가족은 만성적인 갈등상태에 놓인다. 부모의 상속 프로젝트에 동의하지만, 물건 취급당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 아이들, 재산관리인으로서 자신의 역할을 인정받고 싶어 하는 엄마, 가장이면서도 이 프로젝트에서 소외되어 있다고 느끼는 아빠가 갈등의 세 주역이다. 해마다 늘어만 가는, 학교와 집을 떠나는 청소년의 숫자는 가족의 위그를 알리는 다양한 징후들과 함께, 이 프로젝트가 얼마나 위험하고 성공하기 어려운 것인지 말해준다. - p.187

(전략) 하지만 자본주의의 발전이 가족의 경제적 기능을 완전히 박탈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자본주의 경제 안에서 가족은 노동력 재생산의 거점으로서, 그리고 실업의 충격을 흡수하고 경기 확장에 대비하여 예비 인력을 저장하는 장소로서 특별한 중요성을 갖게 된다. '가부장제를 보완하는 국가'가 시대착오적이라는 비난을 받으면서도 자본주의와 훌륭하게 조화를 이루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가부장적 가족에서 관계적 가족으로의 이행은 산업화가 수반하는 자동적인 변화가 아니다. 두 형태의 가족은 동시성 속에 있으며, 자본주의는 후자를 만들어내는 만큼이나 전자를 필요로 한다. - p.189

먼저 환대가 재분배를 포함한다는 점을 확인하기로 하자. 환대란 타자에게 자리를 주는 것 또는 그의 자리를 인정하는 것, 그가 편안하게 '사람'을 연기할 수 있도록 돕는 것, 그리하여 그를 다시 한 번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것이다. 사람이 된다는 것은 사회 안에 자리를 갖는다는 것 외에 다른 게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을 연기하려면 최소한의 무대장치와 소품이 필요하다. 이를테면 누군가를 초대할 수 있는 공간, 갈아 입을 옷, 찻주전자와 차를 살 돈 같은 것 말이다. 그러므로 환대는 자원의 재분배를 포함하기 마련이다. 이것은 아이들이 소꿉놀이를 시작할 때 먼저 장난감을 나누는 것과 비슷한 이치이다. 아무리 욕심 많은 아이라도 상대방이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으면 서로 초대할 수도, 선물을 주고받을 수도 없다는 걸 알기에, 기꺼이 살림을 나누어준다. - pp.193-194

증여는 인정을 추구할 뿐 아니라, 인정을 통해서 비로소 구성된다. (중략) 내가 어떤 물건을 소유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나를 그 물건의 소유자로 인정한다는 뜻이다. 증여도 마찬가지이다. 주는 행위 자체는 증여가 아니다. 주는 행위를 증여로 구성하는 것은 준 사람과 받은 사람의 관계에 대한 특정한 해석이다. (중략) 마찬가지로 우리는 식당 종업원이나 아파트 경비원이 우리의 한 끼 식사와 편안한 잠자리에 얼마나 큰 기여를 하든, 그들이 보수를 받고 일하는 한 개인적으로 감사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 보수가 아무리 형편없더라도 말이다. "가난한 노동자들은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익명의 기부자"[각주:6]라는 바바라 에런라이크의 말은 문제의 핵심을 정확히 찌르고 있다. 이는 증여의 논리가 환대의 논리와 전혀 다른 것임을 의미한다. 환대 역시 주는 행위이지만, 이 줌은 증여로 계산되지 않는다. 환대란 주는 힘을 주는 것이며, 받는 사람을 줄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것이다. - p..196-197

고래들의 공동체와 마찬가지로, 이 고대의 코즈모폴리스를 조긱하는 원리는 열린 커뮤니케이션 - 누구나 제약 없이 참여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 이다. 하지만 그것이 열려 있는 방식은 사뭇 다르다. 고래들은 아무 매개 없이 동시성 속에서, 모두가 모두에게 직접 연결되어 있다. 동일한 소리의 장場 안에 갇혀 있기에, 그들으 ㄴ교신 대상을 선택할 수 없으며 침묵 속으로 물러날 수도 없다. 다른 말로 하면 그들은 서로에게 청각적으로 완전히 노출되어 있는데, 이는 언제나 상대방을 침법할 수 있고, 또 상대방에 의해 침범될 수 있음을 뜻한다. 반면 도서관의 도시 알렉산드리아에서 영혼들은 책을 매개로 서로에게 접근한다. 그들을 연결하는 것은 소통이 아니라 소통 가능성이다. 커뮤니케이션의 지평 전체를 감싸는 소리의 궁륭이 아니라, 도처에서 조용히, 산발적으로 일어나는 교류들이다. 이 교류는 거리에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과 혼자 책 속으로 침잠하는 것을 모두 포괄한다. 독서와 대화 사이에는 아무런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 독서는 또 다른 대화 - 비동시적으로 이루어지는 대화 - 이기 때문이다. - p.200

절대 공동체에 대한 환상은 이러첨 '개인이냐 공동체냐'라는 잘못된 양자택일을 강요한다. 공동체에 속한다는 것이 나와 다른 사람 사이의 벽을 없애는 것 - 문자 그대로 '하나가 되는 것' - 을 의미한다면, 공동체에 대한 옹호는 사생활 침해를 정당화하는 구실로 쉽게 전락할 것이다. 하지만 개인과 공동체는 결코 대립적인 개념이 아니며, 공동체 정신을 추구하는 것과 사생활의 자유를 갖는 것 사이에는 본디 아무 모순도 없다. 개인에게 자리/장소를 마련해주고 그의 영토에 울타리를 둘러주는 것이 바로 공동체의 역할인 까닭이다. 뒤르켐이 지적했듯이, 공공성이 강화될수록 사생활의 자유는 오히려 커진다. 가부장제 하에서 기혼 여성과 미성년 자녀는 사생활의 자유를 갖지 못한다. 그들은 집안에서도 마음 편히 쉴 수 없고, 가부장의 눈치를 보면서 일종의 대기 상태에 있어야 한다. 물론 가부장의 성격이 어떠냐에 따라 그들이 느끼는 압박의 정도는 달라진다. 하지만 가부장이 언제든지 그들을 야단칠 수 있고 심지어 때릴 수 있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개인 공간에 대한 침범은 최종적으로 몸에 대한 침범으로 나타난다. 몸은 자아의 마지막 영토이자, 나머지 영토들 - "개개의 인간 존재를 둘러싼 가상의 구" - 에 대해 개인이 행사하는 주권의 원천이다). 그런데 가부장이 이런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은 국가가 가정을 가부장의 사적 영토로 간주하고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개입을 자제하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면, 가부장 사회의 약자들이 겪는 사생활 박탈은 그들이 공공의 힘이 미치지 않는 곳에 고립되어 있다는 사실과 관련된다. 좀더 일반적으로 말해서, 프라이버시의 결여 - '자기만의 방'이 없다는 것 - 와 공적 공간에서의 배제는 장소 상실placelessness의 두 형태로서, 동전의 양면처럼 맞붙어 있다. 사회 안에 자리/장소가 없는 사람, 사회의 바깥에 있는 사람은 자신을 위해 나서줄 제삼자를 갖지 못했기에, 사적 관계 안에서도 자신의 자리/장소를 지킬 수 없다. - pp.202-203

(전략) 하지만 절대적 환대가 타자의 영토에 유폐되어 자신의 존재를 부인당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뻗치는 일, 그들을 인지하고 인정하는 일, 그들에게 '절대적으로' 자리를 주는 일, 즉 무차별적이고 무조건적으로 사회 안에 빼앗길 수 없는 자리/장소를 마련해주는 일이라면, 우리는 그러한 환대가 필요하며 또 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한 환대는 실로 우정이나 사랑 같은 단어가 의미를 갖기 위한 조건이다. - p.204

환대에 대한 기존의 논의들은 환대를 사회의 외부에서 온 이방인들이 직면하는 문제로 여긴다. 하지만 이미 사회 안에 있는 사람들도 그들의 자리가 조건부로 주어지는 한, 환대의 문제를 겪는다. 절대적 환대라는 말로써 나는 데리다가 그랬던 것처럼 신원을 묻지 않고, 보답을 요구하지 않으며, 상대방의 적대에도 불구하고 지속되는 환대를 가리키려고 한다. 데리다는 이러한 환대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는 절대적 환대에 기초한 사회를 상상할 수 있다. 아니 사회란 본디 절대적 환대를 통해 성립한다고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절대적 환대가 불가능하다면, 사회 역시 불가능할 것이다. - pp.208-209

한편 현대 사회에서는 개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주어져 잇는 정체성의 규정 요소들, 예컨대 국적이나 출신 계급이나 인종이나 성별, 심지어 언어와 문화는 개인의 정체성 서사에 통합되는 한에서만 중요하고, 그렇지 않으면 우연하고 부수적인 요소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는 개인의 정체성의 핵이 더 이상 이런 요소들이 아니라, 그것들을 바탕으로 정체성 서사를 써나가는 주체의 저자성authorship 자체임을 뜻한다. 정체성에 대한 인정은 특정한 서사 내용("나는 레즈비언이다")에 대한 인정이 아니라, 서사의 편집권에 대한 인정이다. 우리는 정체성운동에 대해 많은 지식을 갖지 못했더라도(펨femme이나 부치butch 같은 단어를 모른다 해도) 그저 귀를 기울이고 고개를 끄덕이는 행위를 통해 그러한 인정을 표현할 수 있다("네가 레즈비언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네가 오늘은 레즈비언이라고 고백하고 내일은 그것을 부인해도 상관없다. 나는 너에 대해서 가장 잘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너 자신임을 인정한다"). - p.215

결국 신체공양 의례가 제가하는 문제는 중국인(혹은 한국인)의 야만적인 습속에 관한 것도 아니고, 유별나게 잔인한 심성에 대한 것도 아니다. 그보다는 한 사회가 성원권을 부여하는 방식에 대한 것이다. 유교 사회의 구성원들은 갚을 수 없는 빚을 지고 있다는 점에서 노예와 비슷하다. 물론 그들과 노예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들이 존재한다. 노예는 사람이 아니지만, 그들은 사람이다. 노예에게는 아무런 명예가 없지만, 그들은 명예를 지니며 명예를 추구한다. 노예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사람의 지위를 포기한다. 반면 효자와 충신은 사람다움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건다. 하지만 이 차이들은 어떤 역설에 의해서 희미해진다. 유교 사회의 구성원들은 사람다움을 증명하는 한에서, 조건부로만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들의 인격은 지속적인 시험 아래 놓이며, 언제나 잠재적인 비난에 노출되어 있다. 그들이 모든 비난의 가능성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은 죽음으로써 이 시험을 통과했을 때문이다. (후략) - p.226

그러므로 환대란 어떤 사람이 인류 공동체에 속해 있음을 인정하는 행위, 그가 사람으로서 사회 속에 현상하고 잇음을 몸짓과 말로써 확인해주는 행위라고 말하기로 하자. 그 경우 데리다가 제시하는 절대적 환대의 세번째 조건을 수용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어떤 사람을 절대적으로 환대한다는 것은 그가 어떤 행동을 하든 처벌하지 않는다는 게 아니라, 어떤 경우에도 그의 사람자격을 부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각주:7] 살인같이 반사회적 행동을 한 사람 역시 사회의 구성원으로 계속 환대된다. 다시 말해 그는 사회 안에서 자기 자리를 유지하며, 성원권을 박탈당하지 않는다. - pp.229-230

하지만 베카리아가 무제한의 처벌권을 인정하면서 단지 감성적인 호소에 의존하여 형벌의 경감을 시도한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베카리아는 오히려 범죄에 대한 처벌이 사회계약의 틀 내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역설한다. 범죄자는 사회의 바깥에서 사회와 적대하면서 무한한 복수의 가능성에 노출되는 게 아니라, 사회 안에 있으면서 그 자신도 동의하는 규칙에 따라 정해진 만큼만 처벌받는 것이다. 베카리아는 바로 이런 이유에서 사형에 반대한다. 사형은 범죄자를 사회 바깥으로 내몰고 사회의 적으로 취급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사회의 적이라면, 그는 더 이상 사회의 규칙을 따를 필요가 없어진다. 그의 행위를 범죄로 규정하는 법의 힘은 그에게 미치지 못하고 그의 앞에서 멈추어 선다. 그는 법의 바깥에 있으므로 범죄를 저지른 게 아니다. 따라서 사형은 더 이상 형벌이 아니다. 그것은 순수한 폭력일 뿐이다. 베카리아의 다음과 같은 말은 사형이 내포하는 역설을 정확히 지적한다. "사형은 어떤 의미에서도 권리가 아니다. 그것은 한 사람의 시민에 대한 국가의 전쟁이다."[각주:8] 그런데 이 말은 범죄자를 사회의 적으로 간주하는 한, 다른 모든 형벌에도 해당된다. 범죄자가 사회 바깥에 있다면, 우리는 그에게 어떤 처벌의 "권리"도 주장할 수 없다. 권리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는 주체들이 먼저 상호 인정 관계 속에 들어와야 하기 때문이다. - pp.234-235

(전략) 우선 사회는 주권자 - 국가나 총통 - 처럼 단일한 주체가 아니다. 사회를 이루는 것은 사람들이며, 그들 각자는 타자를 사회적 죽음으로부터 끌어내는 힘을 미약하게나마 가지고 있다. 그리고 자기를 위해 나서주는 제삼자가 한 사람이라도 있는 한, 벌거벗은 생명은 아직 완전히 벌거벗은 게 아니다(이는 발화의 장소성placedness이라는 주제로 우리를 이끄는데, 우리가 벌거벗은 생명들의 인권에 대해 아무리 열심히 이야기하더라도, 우리의 목소리가 그들에게 닿지 않느다면 그들은 사람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권 담론의 취약성은 그것이 신학적 관념 - '신은 자신의 모습을 본떠 인간을 창조하였다' 등등 - 에 기대고 있다는 사실보다는, 담론을 실천과 분리하여 비장소화한다는 사실에서 생겨난다). - pp.246-247

현대 사회의 도덕의 기초에 있는 것은 기독교가 아니라 절대적 환대의 권리이다. 즉 태어나는 모든 인간 생명에게 자리를 주어야 하고, 어떤 명목으로도 이 자리를 빼앗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다. 사람의 신성함이란 바로 이 원리를 말하는 것이다. 사람이라는 것은 사회 안에 자리가 있다는 것이며, 신성하다는 것은 이 자리에 손댈 수 없다는 뜻이다. 낙태의 합법화는 이 원리를 - 위반하기는커녕 - 다시 한 번 확인한다. 태아에게 장소를 줄 수 있는 사람이 엄마뿐이기 때문에, 태아를 환대할 권리 역시 엄마에게만 있다. 사회가 엄마의 의지와 무관하게 태아를 환대하기로 결정하고 엄마에게 임신을 유지하도록 강제한다면, 이는 한 사람의 몸을 다른 사람을 위한 도구로 사용하는 셈이 된다. 즉 엄마의 사람자격을 부정하는 결과를 갖온다. 따라서 절대적 환대의 원리를 일관성 있게 적용하기 위해서는, 태아가 아직 사회 바깥에 있으며, 태아를 사회 안으로 들여보내는 것은 엄마의 결정에 달려 있다고 말해야 한다. - p.259

공리주의자들은 '우리'가 언제나 이미 우리인 것처럼 이야기한다. 그들은 사회를 주어진 것으로 간주하며, 연대의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 그 결과 사회는 인구, 즉 숫자라는 관점에서 파악된 인간 개체들의 집합으로 환원된다. 사회에 대한 이러한 시각은 사람의 관념과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 공리주의자들은 사람자격이 하나의 성원권이라는 것, 우리가 사회에 의해 사람으로 임명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사람이라는 것이 생물학적인 사실에 속한다고 믿는다. 개인은 타인의 인정과 관계없이 자기 안에 내재된  특성에 의해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말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 때문에 어떤 사람이 실제로 사람인지 아닌지 판정하는 일, 다시 말해 그의 사람자격을 심사하는 일이 중요해진다. - pp.270-271

 

김현경, 사람, 장소, 환대

(모든 주석은 원주임)

문학과 지성사

 

  1. 이는 본질적으로 모든 여성이 더러움을 뜻한다. 성폭행이 함축하는 메시지가 바로 이것이다. 강간범들은 대개 '깨끗한 척하는' 여자들에게 자기들의 본질을 깨닫게 해주겠다는 거창한 목표를 갖고 있다. 이러한 가부장주의적 대의 없이 순전히 성충동만으로 일어나는 강간은 흔하지 않다. [본문으로]
  2. Erving Goffman, Interaction Ritual, London: Penguin Books, 1967, p.7; 어빙 고프먼, 『상호작용 의례』, 진수미 옮김, 2013, 아카넷, p.19 참조 [본문으로]
  3. 고프먼은 이것을 얼굴 유지라고 부른다. 얼굴 유지는 개인이 그 자신을 포함하여 누구도 낯이 깎이는 일이 없도록 자신의 말과 행동을 조절하는 것을 말한다. 얼굴 유지는 일종의 의례이다. "이것을 의례라고 할 수 있는 이유는 그 사람이 얼마나 존중받을 가치가 있느냐 혹은 그가 얼마나 다른 사람들을 존중하느냐를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여기서 문제이기 때문이다. (...) 얼굴은 그러므로 신성한 대상이다. 그리고 그것의 보존에 필요한 표현적 질서expressive order는 의례적 질서이다."(Erving Goffman, 같은 책, p.19) [본문으로]
  4. 한나 아렌트, 『사랑 개념과 성 아우구스티누스』. 서유경 옮김, 텍스트, 2013, p.171; 리처드 세넷, 『불평등 사회의 인간 존중』, 유강은 옮김, 문예출판사, 2004, p.181에서 재인용 [본문으로]
  5. 리처드 세넷, 같은 책, pp,180-183 [본문으로]
  6. 바바라 에런라이크, 『노동의 배신』, 최희봉 옮김, 부키, 2012, p.296 [본문으로]
  7. 교정 시설에 수감된 사람은 입소의 순간부터 인격을 부정당하는 경험을 하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범죄에 대해 책임을 묻는 것 그 자체가 범죄자에 대한 환대의 철회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법 앞에 선다는 것이야말로 사람이라는 증거라고 말할 수 있다. "범죄는 (무국적자가) 인간적 평등을 다시 얻을 수 있는 최고의 기회"라는 아렌트의 냉소적인 발언은 이 점을 가리키는 것이다(한나 아렌트, 『전체주의의 기원 1』, 이진우·박미애 옮김, 한길사, 2006, pp.517-518 [본문으로]
  8. 체사레 베카리아, 『범죄와 형벌』, 한인섭 옮김, 박영사, 2006, p.112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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